노인의 되면서 갖게 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행위다. 나도 여러 번 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내가 이제는 값싼 안경을 맞춰주는데 이유는 또 잃을 것이 뻔하지 않겠냐는 것이 다. 안경을 잃고 귀가하는 날, 안경 없는 맨 얼굴을 보고 아내가 묻는다. “또 그 안경을 어디서 언제 잃어버렸소?”
정말 코믹한 아내의 질문이다. 세상에 자기 물건을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짐짓 일부로 잃어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물건을 잃었을 때는 그 물건과 함께 시간과 장소도 잃게 마련이다. 이것을 잃음의 삼중주(三重奏)라 할까. 더 나아가서 잃은 것은 자기 자신이다. 물건을 잃을 땐 자기도 깜빡하는 순간의 자기상실이 따른다. 이때는 잃음의 4중주(四重奏)라할 것이다. 혹시나 하고 내가 머문 곳을 다시 가보아도 역시나 안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잃는 장소와 시간을 확실히 알 턱도 없지만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면 그곳을 찾지만 역시나 역시이다.
물건상실보다 더 괴롭고 비참한 것은 자아상실(自我喪失)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기를 잃은 것만큼 슬픈 것은 없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잃어버린 자아(lost ego)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영원히 자기를 잃은 자여! 영원에서도 잃은 자기로 살 자여!
혹자는 지금 자기는 잃어버려진 상태의 자기라는 것을 부정 확하게라도 알고 산다. 가장 정확한 자아상실은 계시의 범주 안에서만 알게 된다. 우선 자아상실의 자기라는 것을 막연하고도 부정확하게 인지하고서 그럼 취하는 조치로는 자아발견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자기를 잃은 시간과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발견의 미로(迷路)에서 헤매다가 인생을 끝낸다. 딱한지고. 의사이자 공중보건전문가이자 통계학자인 한스로슬링은 ‘팩트플리스’란 책을 내었다.
빌 게이츠가 2010년부터 매년 대학생들에게 추천도 하고 또 직접 이 책을 사서 선물했다고 하는 등으로 그의 저서는 유명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 사람들은 세상에 대에 너무 모른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일수록 실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지금 탈진실(脫眞實) 시대의 사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막연한 느낌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막연한 두려움과 편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더더욱 느낌보다 사실로 나가자는 것이다.
팩트플러스는 “사실 충실성”이었다. 로슬링 박사는 자기주장과 사실을 혼동하지 말라고 그의 저서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노자의 자연주의 사상이나 유교의 실천주의 사상이나 간에 모두 인간의 시초 사건을 모르기 때문에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도 어설프고 막상 이르렀다는 목적지도 허망하다는 것이 성경의 사람들의 간증이다. 의사의 의료행위도 언제 신체의 어느 부분이 탈이 났는가를 알고 후에 치료행위에 들어가는 것이 정도이다. 선진단(先診斷) 후치료(後治療)이다.
시발점에서 종착점이 결정된다. 시발점에서 종착점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여행의 파멸이다. 성경은 인간의 슬픈 역사와 환희의 역사를 그 타락과 구원의 차원에서 조리있게 설명해준다. 나는 언제 어디서 안경을 잃을 줄 모르기 때문에 끝내 찾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잃었다고 생각한 그 안경은 나의 서재 책상 모퉁이에서 되려 나를 찾고 있었다.
권혁봉 목사 한우리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