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석자로서의 독자
이제 한 인간존재로서의 독자는 해석적 정황에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위치에 있다.
독자는 해석자다. 그는 해석자의 위치에서 텍스트와 씨름하고 작업 한다. 글을 읽는 독자이지만, 그 독자는 매우 복잡한 경험 구조를 지닌 인간존재다. 인간존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서 텍스트를 관조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여러 해석자가 밝히고 있듯이, 해석은 독자의 여러 지평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이데베거와 불트만의 “전이해”의 개념이나 가다머의 “선 입관”과 “전통”의 개념 또는 리퀘르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의지” 개념은 독자를 순수하게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해의 출발은 이미 이전의 삶의 실존적 경험과 배경 그리고 인식적 구조의 층으로 형성되어 있는 독자가 텍스트를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을 개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독자가 해석자로서 하나의 프레임이나 구조 틀을 가지고 텍스트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근거에서 독자는 일종의 작가와 같다. 주어진 텍스트를 통해서 독자는 작가가 하는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저자가 의미하는 그 의미를 찾는 노력 자체를 허물어 버린다. 이런 일련의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의 의미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거나 창조한다.
다시 말해,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서 재구성되거나 새로운 의미로 생산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러한 독자를 “작가적 독자”라고 부른다. 자신의 언어로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적 독자는 전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작가란 원래 그만큼의 자유를 가지고 해석에 참여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적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는 완성자가 된다. 더 이상 텍스트를 생산한 저자나 저자가 의도한 텍스트의 의미는 재현되지 않는다. 독자의 권위는 저자가 소멸하기 때문에 텍스트의 권위는 사라진다. 바르트는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저자가 제거되면,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주장은 아주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을 대가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독자가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독자가 텍스트를 ‘이용하기 위해서’ 사용한다면, 텍스트의 의미는 왜곡 되거나 위험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해석은 동일한 텍스트가 읽는 독자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는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IV.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
해석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읽고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인가? 독자는 독자의 의도를 지닌다. 앞서 언급했듯이, 만일 독자가 “내포된 저자”, 즉 마치 텍스트를 구성하는 저자로 텍스트를 읽는다면 이해는 독자의 편의에 따라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움베르토 에코가 밝히고 있듯이, “텍스트는 자체적으로 독자를 만드는 경향이 있는 장치이다.” 이것은 텍스트 이해의 맥락에서 항상 문제가 된다. 따라서 독자가 텍스트 자체에서 출발하지 않는 이해는 어떤 문제를 야기할 것인가?
이해의 구성에서 독자가 배제된 채로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도 텍스트는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없을 듯하다. 앞선 논의에서 밝혔듯이, 전통 적인 해석적 논의에서 독자를 배제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텍스트의 사실적 또는 객관적 의미에 있었다.
독자의 책무는 텍스트의 정확한 역사적 의미나 객관적 이해에 충실하도록 요구받는 것이다. 만일 독자가 그러한 책무를 저버린다면, 텍스 트는 독자의 자의적 또는 주관적 이해가 포함될 것이고, 텍스트의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는 염려를 드러낸다.
이런 근본적인 이유에서 독자는 자신이 텍스트 해석의 과정에 개입되거나 포함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스스로 이해의 과정에서 독자의 행위 및 참여를 막지 않는다.
비록 독자가 단순히 텍스트를 읽을 때 정확한 의미를 그대로 끌어내지 못하지만, 텍스트는 독자의 이해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독자는 더 이상 메시지의 수동적 수신자로 머물지 않고, 독서 상호작용 및 반응의 과정에 적극적인 주체자로 참여한다.” 그것은 독자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독자의 “참여”와 “개입”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처럼 텍스트는 본성상 독자의 행위를 요청한다. 하지만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독자 중심”의 이해에서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텍스트는 독자 중심의 이해를 배격한다. 이런 이유에서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독자 중심에서 의미의 완결을 주장하는 ‘독자반응비판’과 ‘해체주 의’의 해석학을 경계한다.
그러면 텍스트 이해에서 독자 중심의 이해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독자반응비평과 해체주의는 독자를 전지전능한 위치에 올려놓고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고 재창조 하는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독자반응 비평은 독자가 이해하는데 텍스트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독자반응비평에서는 독자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존중한다. 이것은 어떤 텍스트이든 독자가 읽기 전에는 텍스트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독자가 의미를 결정하는 원인이다. 독자를 떠나서는 텍스트의 의미는 실제로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독자가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참여하면서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텍스트는 독자가 구성하기 (혹은 해체하기) 전까지는 미완료 상태다.” 하지만 이 독자반응비평은 여기서 분명한 문제를 보여준다. 그것은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거나 의미를 자신의 선호성에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텍스트의 본래의 가치가 훼손된다.
Gadamer가 말하듯이, 해석은 일종의 놀이인데, “놀이는 놀이자를 통제한다.” 즉 놀이로서의 텍스트는 놀이자인 해석자를 통제한다. 이에 “놀이는 창작가 나 향유자의 태도나 마음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해석은 “놀이하는 자의 주관성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텍스트 그 자체의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야구는 야구경기에 참여하는 야구선 수를 통제한다.
야구선수가 야구를 통제하지 않는다. 이미 야구선수는 야구가 지시하는 규칙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독자반응비평은 비록 독자의 탄생으로 의미를 확대하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성서라는 텍스트 속에 접목이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스러운 성서인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서 임의대로 또는 자의적으로 해독되지 않는다.
독자반응비평과 마찬가지로 해체 주의도 전형적으로 독자 중심에서 출발한다.
결국 해체주의는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에서 비추어보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 해석학은 전형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또는 원의미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해체주의 해석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강조하는데, 하나는 해체주의가 저자의 죽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저자의 의미나 의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다. 특히 해체주의는 텍스트를 읽는 것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쓰는 일에 관심을 둔다. 해체주의는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를 구분한다.
정승태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종교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