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만찬은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제정명령에 의한 성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전 11: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관한 주제 특히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조직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의 주된 토론과 논쟁적 주제로 취급되어왔다. 물론 신약 학자들에 의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과 발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학자들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와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며 또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예배 의식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신약 학자들의 해석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각기 다른 교회 전통에 대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성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교회 전통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장한 견해의 장단점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가톨릭 전통의 주의 만찬 이해
기독교와 로마가톨릭교회 간에는 교리와 신학적 전통에만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형식에서도 독특한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의 예배는 말씀 선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면,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주의 만찬이 중심이 되는 의식 절차로 이루어진다.
가톨릭교회 예배에서 주의 만찬은 필수적인 요소로 정형 화된 거룩한 의식의 틀 안에서 시행된다. 기독교의 주의 만찬의식은 예배 중에 짧은 시간을 할애함으로 예배의 부록으로 오해할 위험성이 있다면, 가톨릭의 주의 만찬의식은 예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동시에 사제가 “Ite, Missa est.(가십시오. 미사가 끝났습니다).”라는 선언으로 예배의 정점을 이룬다.
가톨릭교회의 주의 만찬의식은 파송의 의미를 강조하는 미사 외에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재현,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강조하는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가톨릭교회는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 만찬 자체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제사(the Holy Sacrifice)로 드려지는 성례전(the Sacrament)으로 이해한다.
물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그리스도가 죽는 희생제사가 주의 만찬 때마다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의 만찬이 단순히 과거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회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시킴으로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참여자들이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교회는 주의 만찬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제에 의해 진행되는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역시 강조한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성만찬의 희생제사는 단 하나의 희생제사이다. 그 희생자는 하나이고 동일하다.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바친 그리스도의 그 동일한 희생제사가 사제들의 직무를 통해 지금 바친다. 오직 드리는 방식만 다르다.
미사로 경축되는 이 신성한 희생제사 안에서, 십자가의 제단 위에 피의 방법으로 이전에 자신을 바친 동일한 그리스도가 포함되어지고 피 없는 방법으로 드려진다. 비록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주의 만찬에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다고 주장하지만 떡과 포도주는 피 없이 드려지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이해한다. 가톨릭교회의 주의 만찬은 영적 희생제사가 아닌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의미한다.
이러한 문자적 희생제사 개념은 초대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개념에서 이탈된다. 초기 교부들은 문자적 의미로 그리스도의 살과 몸의 희생제사 개념은 철저하게 거절했지만 떡과 포도주를 통한 영적 희생제사 개념만은 받아들였다.
또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킬 때 출애굽 사건이 자신들의 시공간에 역사적으로 재현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톨릭의 희생제사 개념은 유월절 만찬 전통에 근거하여 주의 만찬을 제정하신 예수의 의도 와도 상반된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유월절 만찬의식의 연장선에서 예수는 주의 만찬을 제정하고 떡과 포도주를 통해 새 언약을 세우고 자기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주장대로 십자가상에서 드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매회 행해지는 주의 만찬으로 재현하거나 갱신하게 된다면 신약성경에서 증언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의 효력을 실제적으로는 부정하게 된다.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에 대한 설명의 근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제가 떡과 포도주에 축성할 때,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형된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야만적인 행위로 주의 만찬을 오해 하기 쉽다.
그러나 화체설은 헬라 철학자들의 세계관과 사고의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철학을 이론적 근거로 사용하여 화체설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공고한 대표 적인 신학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사물을 실체와 부수적인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실체란 그 사물을 정의하게 하는 본질적 속성을 지닌 근본적인 속성을 의미한다면, 부수적인 성질이란 어떤 사물이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적 특징들 즉 시각, 촉각 또는 청각적 요소, 냄새, 색깔, 맛과 같은 오감으로 인지될 수 있는 요소들을 의미한다.
한 예로 여러 종류의 포도주를 다 포도주의 범주로 규정할 수 있는 본질적 요소는 포도주의 실체이다. 포도주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흰 포도주와 붉은 포도주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부수적인 성질에 해당한다. 즉 화체설은 떡과 포도주의 본질적 속성은 사라지고 부수적인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는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본질적 속성인 실체가 채워짐으로 떡과 포도 주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피가 된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기능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주의 만찬에 임재하게 되어 참여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 또는 참여가 일어나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과 연결되어 있다. 즉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지상에서 주의 만찬에 임재하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의 한 방편이 화체설이다.
아퀴나스는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물체처럼 이동하여 이 땅에서 실행되는 주의 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오직 그리스도가 초월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형되는 화체설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화체설)은 이 성만찬에 신성한 능력에 의하여 실제로 일어난다. 떡의 완전한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완전한 실체로 전환되고 포도주의 완전한 실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한 실체로 전환된다. 따라서 이 전환은 표면적인 변화가 아닌 실체적인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종류의 변화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적절한 명칭은 화체설로 칭하게 될 수 있다.
가톨릭의 화체설은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적으로 일치시킴으로 주의 만찬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 교제에 참여하는 신학적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화체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오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에 들어가게 하는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 준다는 장점이 있다.
화체설은 신약성서 본문에 의존하여 세워진 신학적 산물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약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또한 화체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논리에도 꼭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와 부수적인 성질을 개념적으로 구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리할 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자연법칙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의 실체와 그 부수적인 성질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사라지고 그 떡과 포도주의 부수적인 성질 즉 떡과 포도주의 맛, 색깔, 그리고 냄새로는 여전히 남이 있다는 화체설은 그 철학적 기반마저도 불합리하다.
최선범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