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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도피 생활(1) 기약이 없다(삼상21:1~22:23)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21

다윗의 망명, 도피생활이 시작된다.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지만 반란을 우려한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 때문이다. 유대나 베들레헴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에 결국 다윗은 살기 위해 놉 땅으로, 블레셋 땅 가드로, 아둘람 굴로, 모압으로, 헤렛으로, 엔디게 동굴로, 바란 광야로 돌며 무려 15년 동안 긴 도피 생활을 한다. 사울 왕이 죽어서야 그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을 끝낼 수 있었는데 감사한 것은 그 도피생활을 하나님이 줄곧 도우셨다는 것이다.

 

놉,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다

다윗이 급히 달아났던 곳은 놉이었다. 당시 사울 왕국의 수도 기브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다윗은 엘리 가문을 잇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다윗 일행은 먹을 것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에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올렸다가 내온 진설병밖에 없다고 한다. 성소의 상 위에 차려 놓는 열두 덩이의 떡,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물이라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다(레24:9). 그런데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소년들의 곤궁한 처지를 보며 이 원칙을 무시하고 소년들이 성적인 관계를 맺어 부정하지 않았는지만 간단히 묻고 진설병을 내준다. 이 사건은 나중에 복음서에 인용된다. 밀밭을 지날 때 제자들이 손으로 비벼 먹었을 때다.

 

안식일에 먹은 것이 문제가 된다. 밭에서 수확하거나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날인데 먹었다고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바로 이 진설병 사건을 말씀하시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라고 하신다.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 시선을 끄는 것은 다윗의 거짓말이다. 다윗은 왕이 자신을 비밀리에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다(2절), 아히멜렉 제사장을 속인 것, 사울 왕은 이런 명령을 내린 적 없다. 이뿐인가? 자신과 함께 한 소년들이 부정하지 않다는 말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5절). 급하게 도망친 그들이 성결에 대해 힘쓸 여유가 있었겠나? 그런데 성경은 이런 다윗의 거짓말을 너무 담담히, 또 한편으로는 그저 드라마의 긴박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듯하다. 성경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목숨을 살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뜻일까?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는 장발장을 살리기 위해 훔친 은수저는 자기가 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또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쫓아왔을 때 쌩쁠리스 수녀는 장발장이 이곳에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진실도 옳고 생명을 살리는 것도 옳지만 이 둘이 서로 충돌할 때는 큰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작은 잘못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곤궁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하시는 융통성이 없는 분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때 다윗은 먹을 것뿐만 아니라 큰 선물까지 받는다. 엘라 골짜기에서 자기가 목을 잘랐던 거인 골리앗의 칼이다(9절). 창도 칼도 없었는데 웬 득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를 얻었다. 물론 그 칼로 자기 생명을 보호한 건 아니지만 그 칼은 다윗의 용맹함과 승리의 상징, 다윗은 그 칼을 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확신하고, 사람들은 다윗이 위대한 용사임을 칭송한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람의 인정, 이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가드, 미친 체하다

다윗은 유대 땅에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자 적국인 블레셋 가드로 도망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그곳 사람들,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11절), 그것도 다윗을 왕이라 한다. 아마 다윗을 왕이라고 표현한 건 여기가 처음인 것 같다.

 

오히려 적국 사람들이 다윗을 인정한 것인데 다윗에게는 위기다. 왕 같은 존재의 망명은 단순한 한 사람의 망명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환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자신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를 상황이다. 그래서 다윗은 미친 척한다. 대문짝에 끄적거리며 침을 흘리기까지 하는데(13절) 연기력은 평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자존심도 없나 묻고 싶을 정도다.

 

물론 자존심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한건 맞다. 하나님의 일도 살아있어야 가능하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의 최고 존엄 같은 위대한 왕에 대해 이런 불미스러운 행적까지 시시콜콜 다 실어야만 했을까? 좀 뺄 건 빼면 좋겠다 싶은데 아니다. 성경은 다 싣고 있다. 다윗을 좀 폼나게 하실 만도 한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다 실었다. 아브라함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바로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위협하셨듯이 보호해 주셨으면 폼이 났을 텐데 미친 척해서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정말 모양 빠지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폼나게 도우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기적이 아니라 이런 술수와 지혜 아니면 천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방식을 통해서다.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위기를 해결해 간다. 그래서 좀 모양이 빠질 수도 있다.

 

그런데 모양은 빠져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 미친 연기에 속아 넘어간 아기스 왕은 이런 미친놈을 들였냐고 화를 내며 다윗을 순순히 내보낸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쫒겨나서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 34편을 보면 다윗은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찬양한다(6절). “미친 척까지 하고 이게 뭡니까?”가 아니다. 미친 척한 것이 부르짖음이었다. 그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듣고 구원하셨다고 찬양한다.

 

우리는 더티해 보이는 삶에 대한 편견이 있지만 그게 악한 일이 아니라면 괜찮다. 너무 깔끔 떨지 말라. 그곳은 진흙구덩이에서 연꽃이 피듯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는 현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둘람, 공동체가 만들어지다

이번에는 아둘람 굴로 달아난다. ‘피난처’ ‘보 호처’란 뜻이 담긴 블레셋과 이스라엘 경계에 위치한 곳이다. 이스라엘이나 중동지역에는 석회암 지대가 많고, 수백 명이 은신할 수 있는 동굴도 있다. 터키 갑바도기아의 데린쿠유라는 곳은 아예 ‘지하도시’라 불린다. 18층이나 되고, 박해기에 2만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핍박을 피해 이곳에 100년 넘게 숨어 살았다고 하며, 남자들은 포도재배로 출입을 했지만 여인들은그 안에서만 지내 눈이 멀기도 했다고 한다.

 

다윗은 아둘람 동굴에서 사람을 얻는다. 더 큰 인물이 되고 있다. 가족들도 오고(22:1), 사울의 반대세력들과 사울의 폭정 아래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몰려든다(22:2). 제사장을 비롯한 높은 관직에서 극빈자에 이르기까지 상처받은 자들이 다 모여든다. 그 숫자가 무려 4백 명, 물론 오합지졸, 인생 낙오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훈련시켜 통일 이스라엘 건설을 위한 동역자들로 만든다. 그들이 개혁세 력, 혁명세력이 된 것이다.

 

반대로 사울은 더 악독해져 간다. 아무도 믿지 못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친족 베냐민 지파의 왕으로 축소되고 있다. 권력 유지에 급급해 측근만 임명하는 전형적인 ‘가신 (家臣)정치’를 하며 그들마저 믿지 못하고 아들마저 의심한다. 오히려 미친 사람은 사울이다.

 

그런 의심과 광기 앞에 누가 그를 신뢰하겠나?

그런데 역사에 보면 이런 망해가는 독재자와 결탁하여 망나니 칼춤을 추는 사람이 꼭 있다.

 

에돔 사람 도엑이 그런다(22:9~10). 시52편에 보면 도엑으로 인해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심정이 드러난다. 다윗은 그를 ‘포악한 자’라 한다(1절). 9절밖에 안 되는 짧은 시에서 ‘간사하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한다. 그의 고자질로 인해 사울은 아히멜렉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반란 동조 죄목으로 제사장들을 다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린다(17절).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제사장들 모두가 죽음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병사들이 주저하니까 포악해진 왕이 이방인이었던 도엑에게 명령하고, 도엑은 거리낌 없이 85명의 제사장들을 죽인다. 그뿐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에돔사람답게 입신출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도엑은 다 진멸한다(19절).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비아달(아히멜렉의 아들)이 피신해서 다윗에게 자초지종을 고한다. 비극적 소식, 다윗은 내 탓이라며 비통해한다(22절). 염려하던 불안이 현실이 된 것, 참담하지만 반응이 왕답 다. 백성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책임을 안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 잇속만 차리고 자기 패거리의 이익만 구하는 그런 왕이 아니다.

다윗은 고난당하면서 거인이 되고 있다. 사람을 더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도 거인인데다 믿음도 거장이 되고 있다.

 

동굴에 피하고도 믿음의 노래를 부른다(시 57편).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절)라는 위대한 믿음의 노래 다. 은혜 아니면 부를 수 없는 노래, 우리의 노래가 되면 좋겠다.

 

이희우 목사 / 신기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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