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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철학의 정점 : 신앙과 이성의 조화-5

2.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눈 여겨 볼만한 대표적인 학자는 아퀴나스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하여 기독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800여년이 지나고 아퀴나스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진리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다.

 

이성은 자연의 빛에 의해, 신앙은 은총의 빛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봤다. 그는 계시는 이성을 전제로 하며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계시가 없이도 이성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에 문제점을 남겨 놓게 된다. 이성에 ‘자율성’(autonomy)과 ‘자기 충족 성’(self-sufficiency)을 부여하여 이성절대주의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알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은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말한 것은 이성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합리적 성향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전제로 하는 이성’으로 신비주의적 특징을 갖고 있고, 아퀴나스는 ‘이성을 전제로 하는 신앙’으로 합리주의적 특징을 가진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이성을 계시보다 낮은 개념으로 보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통에 서서 아우구스티누스 경우보다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모든 사람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다.

 

우선 인간은 정신이 유한하며 오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고, 철학적인 증명을 다루는 일에 연구할 시간도 없기에, 그런 이유로 우선 인간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아퀴나스는 신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신의 권위나 계시라고 강조하고 있다. 인간 이성의 역할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성적인 추론 작업은 신에 대한 신앙에 이를 수는 없다 치더라도 신에 대한 신앙의 근거 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종교적 지식과 이성적 지식은 다른 것일 수 있겠지만 신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성을 조화시키는 것은 초자연적 신앙, 즉 ‘진리는 하나이기에 학문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는 일치하는 것’이 라고 주장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신앙을 통해 계시된 진리가 받아들여지기 위한 이성의 역할은 무엇일까?

 

김평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퀴나스는 신앙이란 믿는 것에 대해서 이성이 지적 동의를 하는 것이다.”

 

그에게 신앙과 이성은 계시와 합리적 인식을 통해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각각 하나님을 인식하는 길이 열려있다. 계시된 진리에 대해 수용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는 이성의 역할이다. 이성이 신앙의 빛에 의해 조명될 때 이성은 초자연적 이성으로 정화되고 바뀌어 간다.

 

그러나 이성이 수동적이 되어간다고 해도 이성의 주체적인 영역이 없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성이 이해를 추구해 가는 사유의 영역은 늘 상존한다. 신앙의 빛으로 조명된 이성을 가지고 신앙의 진리를 사유할 때만이 신앙에 대한 학문인 신학이 왜곡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신앙의 빛이 이성을 조명할 때 계시된 진리에 대한 이해의 추구는 가능하다.

 

무분별한 이성은 해석하고 그것을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것에 대한 식별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 신앙의 빛의 도움으로 정화된 이성만이 계시된 진리를 통찰하고 식별할 수 있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믿는다는 행위의 직접적인 주체는 지성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아퀴나스는 믿는다는 행위 구조를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확실한 승인과 더불어 숙고한다’를 들어 설명한다.

 

‘숙고한다’는 말은 여기저기 시선을 움직이면서 탐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신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인’이라는 말은 지성의 작용으로 신앙이 갖는 확실성을 의미한다. 이는 확실하면서 불확실한 것이 신앙이라는 의미로서 신앙과 이성의 긴장관계를 주시한 것이다. 계시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진리이고 이성은 아래로부터 주어지는 진리이기에 신학과 철학은 별개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주장하고 있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은 서로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은 계시가 보충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모순이 아닌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려 했고, 이런 입장은 스콜라 철학 전반에 걸쳐 지켜지고 있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이성을 통해 관찰되고 분석되어야 하는 실재들이지만, 그 과정에 신앙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 아퀴나스는 신앙주 의나 이성주의 같은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이성은 신앙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신앙은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을 제한하거나 부수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의 역사와 사건들은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해야만 이해될 수 있다. 인간 이성은 역사 가운데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생각하는가? 아퀴나스는 신학의 부족함을 도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용을 보다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철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는 신학 안에서 철학을 세 분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첫째, 신앙이 전제하고 있는 진리들을 증명하는 데 철학은 매우 유용하다. 신앙의 진리를 이성이 경험에 의해서 철학으로 입증할 수 있다.

 

둘째, 자연적 실례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조명하는데 유익하다. 철학을 활용해 신앙의 진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철학의 이론을 사용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차원이다.

 

셋째, 신앙의 진리들을 거스르는 공격들과의 논쟁에 유익하다. 이와 같이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이 각각 고유의 방법을 지닌 자율적 학문임을 인정하면서도 둘 간의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고 신앙과 이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어느 신학자나 철학자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신학은 자신의 가르침을 보다 명백히 하기 위해서 철학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에 관한 아퀴나스의 결론이다.

그의 입장은 신학과의 관계에서 철학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신앙의 초월성과 이성의 자율성은 양립 가능한 것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성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이성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허무는 것이 맞는 것인가? 대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 신앙 노선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이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는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인가? 신앙 안에 서의 이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서두에서 인간 이성으로 탐구되는 철학적 여러 학문 분야 이외에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이뤄지는 가르침을 인정하고 있다. 철학적 탐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계시적 입장에서의 노력을 취한 것이다. 요약하면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면서도 이 양자가 일체라는 신념이 깔려있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구별과 통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이성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문제-신의 존재, 둘째, 철학과 계시의 양측을 포함하는 문제-창조, 셋째, 계시에만 속하는 문제-삼위일체나 구원이다.

김종걸 교수 / 한국침신대 신학과(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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