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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도피생활(5) 망명하는 다윗(삼상27:1~12, 29:1~11)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25

 

다윗이 3000명이나 되는 진영에 침투해 잠이 든 사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머리 곁에 두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간 것을 안 사울은 “내 아들 다윗”이라며 “다시는 해하려 하지 않겠다”고 한다. 26장에서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26:25)고 했었다. 말끝마다 “내 아들”에 축복까지 하지만 26장은 각각 자기 길로 간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27장을 보면 사울 왕의 약속을 믿을수 없었던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을 떠난다.

오랜 생활을 도피 생활로 보냈던 다윗은 유대 땅이라면 어디든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날수 없었기에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

다윗의 망명은 처음이 아니다. 암몬으로 망명한 적도 있고, 블레셋 아기스에게로 망명해서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한 적도 있다. 그때는 잠깐이었지만 이번 망명은 기약이 없다. ‘1년 4개월’(27:7)인지, ‘여러 날 여러 해’(29:3) 가 얼마나 더 긴 기간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다윗의 이번 망명에 대한 시각은 곱지 않다. 올바르지 못한 선택, 심지어 비신앙적 선택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27:1)이라는 문장 때문,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이나 힘을 의지한 자기 생각대로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유대라는 약속의 땅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실수했다는 것이다.

 

물론 실수일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 좋아도 실수할 때가 있고, 고난이 장기화되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지 않나? 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나? 다윗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닌가? 하나님도 이 선택을 잘못된 선택이라고 지적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의 형편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국민 영웅이 된 다윗, 20대를 현상금 붙은 지명수배자로 18장부터 줄곧 사울 왕에게 쫓기고 위협당했다. 적어도 10년은 도망 다녔다. 십 광야, 마온 광야, 엔게디 광야, 바란 광야 등 메마르고 인적 없고 거칠고 잔혹한, 광야라는 광야는 다 다녔다. 광야가 다 비슷할까? 다윗은 광야의 베테랑이지만 광야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은 게 아니다. 광야의 고통은 매번 다른 고통, 다윗은 살려고 계속 도망다녔다.

 

“만일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시55:6~8) 날개 없는 다윗,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 유대 땅에 있는 한 사울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쉬운 선택이었을까? 고국을 떠난다는 것, 그건 언어나 문화, 권리 등 모든 익숙한 것들을 다 포기하는 것,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법적 보호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나그네의 서러움 정도로 생각할 선택이 아니다. 가끔 한국인이 외국에서 현지인들로부터 인종차 별적 조롱과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망명은 더 위험한 것, 낯선 곳에서 항상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더욱이 선택한 망명지가 블레셋, 적대 국가다. 블레셋 입장에서 다윗은 골리앗의 목을벤 적국의 전사, 블레셋의 원수다. 그런데 하필이면 블레셋으로 망명?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한편 이 망명은 새로운 성장의 기회이기도 했다. 블레셋 가드로 피신했지만 그 곳 왕에게 부탁해 시글락이란 곳에 자리를 잡는다. 기대와는 맞지 않은 장소지만 시간을 벌고 왕이 될 때까지 기지를 확보한 셈이다.

 

그 시글락에서 다윗의 왕국이 시작된다. 거기서 사울의 대안세력으로 성장한 것, 예상외로큰 어려움 없이 정착하고, 정착 정도가 아니라 거인이 된다. 사울의 지속적인 공격 때문 이기도 하지만 매번 어쩔 수 없는 그의 선택 때문이다. 여하튼 홀로 시작한 도피생활이 어느덧 600명이 함께 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그 공동체와 함께 적국으로 망명까지 왔기에 왕이 되지 않고는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늘 쫓기는 도피 인생이었는데 항상 나가떨어지는 것은 상대방, 맞기만 한 것 같은데 싸움에서 늘 이긴다. 매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실수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지적하기보다 다윗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고 도와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믿음, 어떤 선택을 하든 믿음만 있으면 살고, 미래가 보장된다.

 

지혜로운 처신

다윗의 망명도 망명생활도 지혜로운 처신 이었다. 블레셋 가드 아기스에게로 갔지만 다윗에게 수도 가드는 위험한 곳, 아기스 왕 입장에서도 적국의 전사인 다윗을 나라의 심장 부인 가드에 두는 것은 꺼림칙한 일, 그래서 남부 시글락으로 다윗을 보낸다.

 

기대했던 곳은 아니다. 너무 시끄러운 곳, 아기스는 시글락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윗을 이용한다. 그런데 다윗은 그 시글락을 발판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간다. 남부 지역을 혼란케 하던 사람들을 공격했다(27:8). 이 일이 블레셋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유다에게도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27:9) 좀 잔인해 보이지만 성경은 혼란 세력을 정리하고 탈취물을 아기스 왕에게 바친 다윗의 엉뚱하게 보일 수 있는 충성을 지혜 로운 처신으로 다룬다. 아기스 왕이 공격한 곳을 물었을 때에도 다윗의 대답이 지혜롭다.

 

다윗은 유다 족속을 공격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쪽 지역, 또는 그 남쪽을 털었다고 말한 다(27:10).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좀 교묘한, 지혜로운 대답이다.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이 자기 부하가 되었다고 믿었다(27:12).

 

망명자는 처신을 교묘하게 또는 지혜롭게 해야 하는데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아기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남쪽의 이방족속들을 몰살시켰다. 고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행위라 현대의 윤리로 비판하면 안 된다. 다윗의 목표는 블레셋에서 살아남는 것, 또 적국 왕에게 충성하다가 유다 민족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 으로 훗날 비난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다. 그러나 이건 와신상담(臥薪嘗膽),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참고 참았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때가 되면 높이 시리라’ D-Day를 기다린 다윗의 지혜가 돋보인다.

 

대략난감?

다윗의 망명생활은 순간순간이 대략난감,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다. 배경은 29장, 유대왕 사울의 군대와 블레셋의 도시국가 연맹체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진다. 이름하여 ‘아벡 전투’, 아벡은 서쪽 해변길의 길목에 위치한 곳, 사울 부자가 최후를 마친 곳이다.

 

아기스는 블레셋 도시연맹의 수장이었던것 같다. 그런데 아기스는 다윗을 신뢰하여 다윗을 이 전투에 데려가려 한다. 대략난감, 블레셋을 위해 출전하면 유다 군인들과 싸워야 한다. 한편 다른 도시국가 방백들도 대략 난감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이 반대하고 나선다. 적국의 용사인 다윗을 데려갔다가 혹시 싸움 도중에 유대 편에 서면 오히려 크게 당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아기스가 다윗을 적극 변호하자(29:3) 방백 들이 펄쩍 뛰며 다윗을 시글락으로 돌려보내 라고 건의한다. 어쩔 수 없이 아기스가 물러선다. 그러나 다윗을 불러 함께 출전할 수는 없어도 신뢰한다고 말한다(29:6,9).

 

세 번이나 다윗을 인정하고 변호한 것이다. 다윗이 상대방을 단순히 권모술수의 대상이나 이용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나름 충성하며 성의를 다했기에 적장도 감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기스가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도 다윗은 자기 민족 유대를 공격하는 대략 난감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내심 기뻐하며 돌아섰어야 하지만 오히려 항의했다. 섭섭하다는 듯이 말하고, 또 ‘내 주 왕의 원수’라며 말을 참 잘한 다(29:8). 단 한 번도 유다를 원수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내 주 왕을 괴롭히는 세력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 대략난감의 상황에서도 너무 지혜롭다.

 

이런 충성의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타개해줄 것을 믿은 것이다.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없나? 애꿎은 머리 쥐어뜯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어진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상황을 콘트롤하는 분은 하나님, 하나님은 한 번도 다윗이 사울과 직접 맞붙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망명자와 같이 살고 있는 우리도 믿음과 지혜로 무장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보호하고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롬8:28).

 

이희우 목사 / 신기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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