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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망교회, 고치는 목회에서 세워가는 목회로

서망교회 김승환 목사

서망교회의 문을 열고 나서면 저 멀리서 부둣가와 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경관 하나는 최상의 조건이다. 은퇴 후 평안하고 조용한 노후를 보내기에 충분한 곳이다. 서망교회 담임인 김승환 목사는 이러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그에게 처음부터 농어촌목회에 대한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 목사는 서울에서 40여년 동안 목회를 해온 베테랑이다. 그는 파주의 교하에서 정착을 도모했으나 신도시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서울 삼호교회(안종대 목사)와 수원 원천교회(김요셉 목사)에서 잠시 지내게 됐다. 하지만 스태프로 활동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 나섰고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지금의 서망교회였다. 

“교회 리스트를 쫙 뽑아보니까 갈 만한 교회는 여기밖에 없었어요. 다들 이런저런 조건을 내걸고 그랬는데 좀처럼 내 상황과 맞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서망교회가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시하니까 한번 답사를 가보기로 했죠.”


당시 서망교회는 2년 동안 사역자가 없는 상태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터였다. 담임목사로 이름이 올라온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예배를 드리지는 않았다. 교회 곳곳에 얼룩진 곰팡이와 거미줄이 서망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택 또한 관리가 전혀 안 돼 들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원래 서망교회는 교인이 30~40명 정도가 모이는 수준이었지만 아무래도 위치가 도시가 아니다보니 이래저래 어려움이 있었다. 이곳에 부임했던 목회자들 가운데 서망교회를 단순히 거쳐가는 곳으로만 여기고 도회지에 새로운 자리가 나면 후임자조차 생각하지 않은 채 떠나버려 교인들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사건들이 계속되니 여기 있던 교인들 대부분이 다른 교회로 흡수되고 집사님 한 분이 교회를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목회자의 한사람으로서 그것이 너무 미안했죠. 그래서 집사님에게 내가 바로 결정할 수는 없고 집사람과 상의한 후에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올라왔어요. 아내에게 여기 간다는 말을 안하고 왔거든요. 아내가 좋다고 하면 가기로 하고 싫다고 하면 응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김 목사가 사모에게 서망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자 사모의 대답은 흔쾌히 “갑시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김 목사가 현재 교회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모는 쌍수를 들고 환영을 했다. 이에 김 목사는 당시 소속해 있던 원천교회에 이 사실을 알렸고 김요셉 목사는 이사 비용으로 100만원을 지원해줬다. 하지만 진도로 이사가는 이사 비용은 160만원이 필요해 1t트럭을 원천교회에서 빌려 직접 짐을 옮기기로 했다. 


때는 2007년 7월 19일, 긴 시간을 달려 진도에 도착했다. 함께 온 사모와 딸은 마치 에덴동산과도 같은 아름다운 주위 환경에 기뻐했지만, 거미줄이 구석구석 자리 잡은 교회 문을 열자 역시나 기겁하고 말았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들어가서 일단 잠잘 곳만 걸레로 닦아서 정리를 했어요. 그러고나서 아내에게 여기 어떠하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을 안하더라고요. 대략 한 달을 정리만 했어요. 그때는 가진 돈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직접 손보고 해서 이제는 그나마 지낼만한 정도는 됐죠. 처음에는 여기에 눌러있을 생각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계속 있을 예정입니다. 서울에서 한 두번 좋은 교회가 있다고 올라오라고 했는데 사양하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거기가 그렇게 좋냐면서요.”


서망교회의 새단장
김 목사는 서망교회에 부임하면서 리모델링이든 신축이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교회를 새롭게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보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교회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고 싶었다. 그렇게 교회에 실망했던 이들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목회자로서의 책임감일수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가진 것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답은 역시 기도밖에 없었다. 김 목사는 3개월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필요를 아뢰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네가 3년간 이곳에 머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김 목사는 “물론이죠. 제가 3년을 있으면 뭘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하나님께 “지금 차가 없으니 봉고차 하나를 주시고 교회를 리모델링하든지 신축을 하든지 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 주일, 김 목사는 교인들에게 “우리 3년 후에 교회를 리모델링할 것”이라고 자신있고 거침없이 선포했다. 


시간은 흘러 3년째가 다가오는 2010년 6월이 됐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김 목사는 속이 타들어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웃던 아내가 야속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6월 14일, 기적의 시작을 알리는 전화벨이 울렸다. 차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울산의 한 장로교회에서 사용하는 봉고차인데 전화를 건 사람은 15인승이 필요했지만 해당 봉고차는 9인승이라 자신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당장 차를 인수해왔다. 그렇게 차 문제는 응답을 받았다. 이제 리모델링 응답만이 남은 상태였고 이 기도 또한 이내 응답을 받았다. 7월이 되자 교회에 리모델링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에 보상을 받은 집사가 십일조를 하고 또 지나가던 한 권사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느냐”며 300만원을 헌금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돈이 약 850만원에 달했다. 하지만 이 돈으로는 사택까지 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일단 교회 먼저 리모델링 하기로 하고 업자를 불렀다. 그런데 업자가 사택을 보더니 “목사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십니까? 이러면 병 걸립니다”라며 사택을 먼저 공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850만원 뿐이라고 만류했지만 해당 업자는 오히려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며 사택 공사를 강행했다. 


업자에게 김 목사를 능가하는 기도의 은사가 있었는지 그 이후 이런저런 일들로 2700만원이 모이는 기적이 일어났다. 직접적으로 건축을 돕는 손길도 계속 이어졌다. 리모델링 중간에 있었던 돕는 손길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교회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헌금을 교회 리모델링에 쏟아부으며 김 목사 부부가 사용하는 한 달 생활비는 단돈 48만원, 결코 쉽지 않은 나날임에도 김 목사는 못 살겠다라거나 지겹다는 생각이 아닌 하루하루 기쁨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교회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예전 교인들이 다시 예배를 위해 발길을 옮기기도 했다. 

 

 

고침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이렇게 오랜시간 리모델링에 힘을 쏟은 서망교회는 이제 거의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어 김 목사가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디뎠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곳을 탈바꿈했다. 김 목사는 이제 고치는 작업이 아닌 새롭게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비전을 밝혔다. 

 

“카페 교회를 해보고 싶고 문학적으로 목회할 수 있는 방식으로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진도에 국악이 굉장히 유명해요. 국악고등학교도 있고 남도국악원도 이곳에 있거든요. 남도국악원의 무형문화재인 스승에게 사사받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 중 30명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자원들을 교회가 수용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로 나아가는 것을 꿈꾸고 있어요.”


서망교회의 또 하나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슬픈 기억으로 자리잡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팽목항(현 진도항)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세월호를 추모하기 위해 진도항을 찾은 이들 중에 서망교회가 눈에 보이자 기도를 하기 위해 문을 두드린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세월호 사건은 진도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세월호의 아픔을 딛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에서 팽목항을 진도항으로 이름을 바꾸고 암울했던 당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아파트를 짓는 등 소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부지와 조건이 조성돼 지역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김 목사 또한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며 (진도와 서망교회에) 소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기대했다.

 

농어촌목회, 두렵지 않아요
김 목사는 도시 목회자들이 시골이나 외진 곳에 부임하기를 두려워하지만 사실 농어촌목회가 도시목회보다 더 좋은 점이 많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계속 하나님을 체험하고 간증거리가 수도 없이 나오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자신의 목회가 농어촌목회의 모델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고백했다. 자신을 표본으로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러한 멋진 목회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동기부여를 불어넣고 싶다는 것이다. 

 

“빈 교회라든가 이런 교회를 찾아서 들어가시면 임대료 걱정도 안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그냥 받아 먹고 살다 보면요. 행복해집니다. 비전도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고 하나님께서 쌓아가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정말 일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사람이 점점 모이더라고요.”


김 목사에게 어찌보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작한 진도에서의 목회는 단순히 농어촌목회의 표본만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모든 목회자들의 표본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가 꿈꾸는 소망대로 진도가 유배의 땅, 슬픔의 섬이 아닌 희망의 섬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한다. 

진도=범영수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