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척을 준비하며
개척을 작심하기 전까지 교회 개척을 갈망하거나 계획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좋은 담임목사님을 만나면 그분을 도와 공동체에 필요한 사역을 섬기며 살아가고픈 마음이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섬겼던 소소한 교회 허드렛일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차량 운전, 복사, 램프 갈기 등. 뭐든 교회 관련된 일이라면 의미 있다고 믿으며 전임 사역까지 이어왔습니다. 마침 마지막 사역지에서 좋은 목사님을 만나 행복하게 열심히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사역한다는 것은 피곤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소모되는 느낌을 받지 않았기에 즐겁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개척의 소명은 순식간에 제 마음에 임했습니다. 작지만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 내 삶에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저를 채웠습니다. 한 번도 개척 이야기를 꺼낸 적 없던 제가 갑자기 연고도 없는 부산이나 경남에서 개척하면 어떻겠냐는 말에 아내는 담담히 긍정해 줬습니다. 아내의 대답이 하나님의 선명한 신호라 믿고 아내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신호가 분명했다고 해서 바로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존경해오던 담임 목사님께 먼저 상황을 나누며 공동체에 큰 무리가 없도록 조율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교회의 배려로 조급하지 않게 기도하며 개척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개척을 준비하며 떨림은 있었지만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렇게 저를 인도해 오셨기에 이번에도 뭔가 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 개척을 마음먹고 나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 대학원 7년이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과정이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인생의 진짜 시험을 앞두고 있는 듯한 묘한 긴장에 기분 좋은 떨림을 경험했습니다.
일하는 목회자의 길
이미 말씀드렸듯이 개척을 생각하거나 계획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일하는 목회자는 제 삶의 선택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워낙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면서 학업을 마쳤기에 넉넉지 않았지만 사역만 하면서 살아간다는 자체가 좋았습니다. 앞으로 내 삶에 사역이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개척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사입니다. 감사하게도 마지막 사역지에서 사택을 제공받았기에 다음 목회자를 위해 책상보다 집을 먼저 빼야만 했습니다. 분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적은 예산에서도 좋은 집을 주셨고 기쁘게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 가던 날, 승강기에 손 글씨로 쓰인 공고문을 보았습니다.
“관리소장 구함.”
40세대 작은 아파트의 1인 관리소장의 급여는 80만 원. 업무는 소소했습니다. 개척하면 많이 바쁠 것 같지도 않고 가장으로서 역할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아내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해볼까?”
“그러시든가.”
아내가 또 허락했습니다.
입주자 대표 임원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저를 마주하고는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너무 젊은 사람의 연락이라 반가우면서도 염려가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70대 어르신이 소일거리처럼 아파트를 관리했는데 부족함이 많아서 혹시나 하고 공고문을 붙여보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빨리, 그것도 젊은 사람의 연락을 받을 줄 몰랐다며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느낌이 왔죠. ‘내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겠구나!’ 입주민의 요구사항을 다 들었습니다. 특별한 기술보다는 성실하게 청소하고 약간의 행정력만 있으면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안했죠. “저는 경비처럼 계속 앉아서 자리를 지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업무는 밤이든 새벽이든 낮이든. 언제든 처리해 두겠습니다.” 면접 대상자였지만 저는 당당했고 그렇게 일하는 목회자가 됐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