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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우울과 탈진에 대하여-5

변상규 교수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

목회자는 탈진에 대해 어떤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 할까?
첫째로 “나”를 돌아봐야 할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둘째로 육신에 건강검진이 필요하듯 전인적인 건강검진이 필요한 때가 됐음을 자각해야 한다. “목회는 먹회”라는 말이 있다. 반드시 음식을 조절해야 한다. 당뇨나 지나친 복부비만은 적신호다. 그리고 미뤄뒀던 운동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임해야 한다. 몇 년 전 타계하신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의 목회상담학 교수인 하워드 클라인벨은 평소 운동을 하는 것은 “몸에 선물을 주는 행위”라고 말했다. 몸에 그간 못 준 선물을 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셋째로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한다. 즉 재소명에 대한 부르심이다. 흔히 말하는 첫사랑의 회복이다. 주님이 나를 불러주신 그 부르심을 기억하며 지금 있는 현장에서 다시 한번 재소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첫 부르심을 받았던 기도원이나 교회에 가서 목 놓아 기도해보는 것도 은혜를 회복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엘리야가 동굴에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살아나고 소명을 회복했듯 각자의 “영적 동굴”로 들어가서 기다리며 기도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넷째로 인정받음의 욕구에서 벗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페르소나(역할, 가면, 체면, 명함)가 유난히 강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 목회자의 직업이다. 우리들도 보통 사람과 비슷한 욕구,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며 살지만 목회자이기에 일반인들이 모르는 십자가를 하나 더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위선의 십자가”가 그것이다. 예로 매년 5월 가정의 달이 되면 우리는 가정의 행복을 말한다. 목회자 가정은 그리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목회자이기에 가정의 행복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 위선이다. 그래서 위선의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위선의 십자가라는 말도 결국은 인정받음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닌가? 인정이라는 주제만큼 우리를 유혹하는 주제가 또 있을까 싶다. 하나님의 인정과 사람의 인정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목회자 아니던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인정해 주셨기에 목회자가 된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더 해야만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인정중독에 빠져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아마도 어린 시절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부모님을 하나님에게 전이시켜 그런 인정 갈망, 인정중독이 커졌을 수도 있다. 그리스의 소설가이며 영성가이기도 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우리에게는 예수 최후의 유혹으로 더 잘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자신이 죽으면 묘비명에 세 마디 글귀를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실제 그리스의 이라클리오라는 곳에 있는 그의 작은 무덤의 묘비명에는 그가 부탁한 세 마디의 글귀가 그리스어로 각인돼 있다.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가 무엇보다 누군가의 인정을 기대하지 않는 주체로 설 수 있다면 사실 무엇이 두렵겠는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탈진한 목회자들은 이제 누군가의 인정에 갈망하는 삶의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나는 상담자로서 내담자에게 그런 말을 하곤 한다.


“당신 나이가 50세이면 지금 당신이 5세짜리 당신을 입양한 것과 같아요. 당신 스스로를 5세로 생각하고 입양한 아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칭찬 격려해 주시면서 이제부터 잘 키워보세요.” 


탈진한 목회자들도 그렇다.
탈진할 정도로 물불 안 가리고 뛰어온 자신을 조금 안쓰럽게 생각하고 보듬어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목회방향이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영광(pro gloria dei)”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삶과 목회는 보다 더 영성적인 지향성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의 의미를 균형 잡힘이라 생각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힘 말이다. 탈진은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삶의 무게중심이 치우친 결과이다. 온전성(Wholeness)으로 부름받는 출구가 바로 탈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가 한 말 중 이런 멋진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가 있다. 바로 성령의 충만이다.”


어찌 보면 목회자의 탈진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기에 이제 성령이 나와 나의 목회를 이끌어 가셔야만 된다는 영성으로의 부르심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부르심의 새로운 시작의 길이 탈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재소명의 시작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지독한 코로나 시대에 모두 다 지쳐있고 힘들어한다. 그래서 미국의 한 목회자가 했다는 말이 내 마음에 메아리치듯 울린다.


“영혼이 아픈 자들을 위해 설교하세요. 결코 교인이 줄지 않을 겁니다” 설교하고 목회하되 치유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전인이 아픈 자를 위해 목회할 때 우리의 목회가 나도 치유 받고 교인도 치유할 수 있는 전인 치유의 목회가 되리라 믿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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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