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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참회 (삼하12:1~31)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36

“사람 하나를 발가벗겨 세상 사람들에게 전시하려 한다. 그 인간이 바로 나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참회록 시작 부분이다. 그는 “선악을 가리지 않고 감추거나 과장 없이 모두 말하고 싶다”고 했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이제 당신을 떠나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있던 나를 거두려 한다. 나는 그때 명예와 돈과 결혼을 열망하고 있었고, 당신은 나를 보고 웃고 계셨다. 욕망을 추구하던 나는 쓰디쓴 곤경을 당해야 했지만 주의 자비는 그 곤경을 통해 크게 역사하셔서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며 참회했다.


또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는 “성인이 된 후 30년을 쾌락주의자 또는 허무주의자로 살았다. 책도 많이 썼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지만 남은 것이 없다. 5년 전 나이 50이 됐을 때 비로소 내가 죄인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했는데 그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며 “예수 믿는 것이 지혜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 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다윗도 그랬다. 성추행 또는 간음죄에 살인교사라는 씻을 수 없는 죄인 다윗, 부하 우리아도 없애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으며 이제는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모든 과정을 보신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다윗 인생에 리셋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신다(1).


책망 받다 
최고 권력자였기에 설령 누군가가 수군거리더라도 무시하고 죄가 드러나도 덮어버릴 힘이 있었기에 이젠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산 착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셨다(11:27).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나단을 보내신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농담으로 “들키지만 말라”를 제11계명이라 하지만 감출 수 없는 게 죄다.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썩고 확대된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데 다윗을 찾아간 나단이 입을 열었다. 다그치지 않고 지혜롭게 비유로 말한다. “한 성읍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는데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지만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가진 것이라고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 암양 새끼를 자식처럼 여겨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품에 품고 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부자집에 손님이 찾아오자 부자는 자기 양과 소를 잡는 것이 아까워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1~4).


얘기를 듣던 다윗이 분노한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지라”(5) 죽일 놈이라는 말이다. 이어서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주어야 하리라”(6)고 한다. 걸려들었다. 이제는 자기 말에 책임져야 한다. 나단이 직설적으로 책망하지 않고 비유를 택한 이유는 왕이 무서워서라기보다 다윗의 죄를 확실히 밝히기 위함이었다. 절대 권력자라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묵살해 버릴 수 있었기에 빼도 박도 못하게 한 것이다. 권력자들이 입술로는 정의, 공정을 얘기하면서 자기들은 예외이기 때문이다. 이게 인간 사회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기 위해 지혜와 인내가 필요한데 나단이 그걸 참 잘했다. 


나단은 “당신이 그 사람”(7)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그런데 다윗은 내로남불하지 않는다. 무슨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돌아켜보면 부요케 하신 분은 하나님, 한낱 목동이던 자신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8). 그런데도 왕이 되자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았다. 가난한 자에게는 전 재산인데….


나단의 책망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9). 우리아 부부에게 행한 짓도 문제지만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것, 단순한 탐욕이나 죄가 아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 그러니 다윗은 책망받을 만했다. 


회개하다
이게 다윗의 위대함이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책망에 납작 엎드린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 즉각 시인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아를 죽였듯이 나단 선지자도 처리하면 그만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니다. 다윗은 납작 엎드렸다. 다윗답다. 눈물로 탄원한다(시51). 시 51편을 보면 반복된 간구로 죄를 통회한다(1절, 2절, 7절, 9절 등). 


그리고 뼈가 꺾이는 처절한 아픔을 겪었던 것 같다(시51:8). 시 32편에서도 다윗은 “내가…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32:3),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32:4)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누르는 처절한 상황이라 했다. 다윗은 심령이 상하고 고통받았다고 한다(시51:17). 


어떤 변명도 책임회피도 하지 않고 다 인정한다(시51:3). 자신의 죄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사실도 안다(시51:4).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씻을 수 있는 큰 죄라고 토로한다(시51:1). 죄가 너무 크고 심히 부끄러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켜”(시51:9), “고개 좀 돌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자기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깊이 인식한다(시51:5). 그래서 씻어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탄원한다. 자기 안에는 더러움과 거짓뿐임을 알고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새로운 영,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실 것을 간청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외형적 제사가 아니라 죄의 깨달음으로 인한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 진실한 변화에 대한 갈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시51:16~17).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갈망하며 참회한다. 


그 결과 이런 찬양을 부르게 된 것 같다.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자복은 댐의 수문을 여는 것과 같은 것, 자복하지 않았다면 갇혀있는 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압력을 느꼈겠지만 자복해서 압력이 감해진다. 


흔히 자복이나 참회는 옛날얘기고 요즘은 무조건 잡아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살아있는 고기는 짠 바닷물 속에서 살아도 그 살 속으로 짠 바닷물이 배어들지 않는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단은 용서를 선언한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13) 그런데 용서는 받지만 대가는 치뤄야 한다. 대가가 크다.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11). 집안에 권력 다툼이 끊임없고 큰 전쟁이 나고 아들들을 잃는다. 안타깝다.


당장 불륜 관계에서 아들을 낳지만 곧 죽는다. 금식하며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한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양심에 걸려 무책임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만 다윗은 자식이 무슨 죄가 있나 그런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간절해서 결국 그 아들이 죽자 신하들은 차마 말을 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아들이 죽자 다윗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툴툴 털고 일어난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한 후 음식을 먹는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인다(22~23). 못 잊고 미련을 갖거나 원망하는 것은 무익한 것,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매이지 않는다.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그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회복되다
다시 회복이 시작된다. 우리아의 아내로 불렸던 밧세바도 “그의 아내 밧세바”(24)라 불린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둘 사이에 다시 아이를 주신다. 솔로몬이다. 평화란 뜻을 담은 이름, 불륜으로 태풍이 몰아쳤지만 이 아이를 통해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다윗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다른 이름은 ‘여디디야’,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는 뜻이다. 다윗이 회복된 것이다.


잘못된 만남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역사를 만드신다. 그래서 범죄한 이후가 중요하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연필로 쓴 것처럼 지울 수 없다. 엉망이 될 때도 있지만 다윗처럼 회복돼야 한다. 


사울은 회복에 실패해서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지만 회복이 가능하다(롬8:28).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까지 주신다. 11장 1절부터 시작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요압이 승리하지만 암몬의 수도인 랍바를 점령하는 요압은 최후의 영광을 다윗에게 넘긴다. 전쟁 동안 다윗이 한 일이라고는 불륜에 이를 무마하려는 살인교사였지만 참회한 다윗은 승리의 영광을 누린다. 그러니 다윗의 회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은 참회한 다윗을 용서하며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 그 은혜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사죄받은 기쁨을 다윗은 이렇게 선언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우리도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혹시 잘못하더라도 참회로 용서받고 아름다운 인생의 작품을 써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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