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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가정의 비극(2)

아들 압살롬의 반란(삼하14:1~15:12)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38

수많은 축복을 경험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멋진 관용구로 노래했던 다윗, 그리고 세상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구원의 잔’을 높이 들며 건배했던 그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범죄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다. 
11장의 범죄 사건 이후 12장부터의 다윗은 안쓰러울 정도다. 책망과 징계가 매우 가혹하다. 그 추락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절정에 이른다. 가정의 비극이자 나라의 비극이다. 그런데 이 또한 다윗이 마셔야 할 쓴 잔일 것이다.

 

압살롬을 챙기는 충신 요압
잘난 아들 압살롬이 다윗에게 뜨거운 감자가 됐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 살인자가 되고, 결국 요단강을 건너 어머니 마아가의 고향 그술로 도망치는 탈주자가 됐다(13:37~39). 


다윗은 비록 살인자이기는 해도 장남이나 다를 바 없기에 망명간 아들 압살롬이 그립다(13:30). 이런 왕의 마음을 헤아린 충신이 요압이다. 요압은 드로아로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여인을 데리고 와 그 여인이 왕에게 요청하는 형식으로 압살롬을 챙긴다.


그 여인은 과부인 자기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들이 들에서 싸우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였고 사람들은 그 살인자를 내놓으라 한다며 죽인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 똑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가 참 중요한데 안개 속에 있던 다윗의 시야를 확 열리게 하는 아주 지혜로운 접근이었다. 


문제의 본질을 정리하는 명쾌한 제안, 결국 다윗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1절)고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 이유는 다윗 왕을 위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왕의 답답함을 시원케 하는 지혜를 동반한 충성심이 돋보인다(잠25:13 참조). 


결국 요압의 지혜로운 처사로 다윗이 압살롬을 컴백시키기로 한다. 그때 요압이 내세웠던 여인의 마지막 충고가 멋지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14절). 다윗은 압살롬을 더 이상 죽은 자처럼 버려둘 수 없었다.


컴백하는 압살롬
압살롬은 3년 동안의 유랑 생활을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잘난 아들 압살롬. 성경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이 아름다웠다고 한다(25절). 그런데 이게 문제였을까? 그는 너무 자신감이 넘쳤고 오만했다. 사람은 약간 부족한 것이 있어야 긴장하고 노력하는데 압살롬은 너무 잘났다.


다윗과 달랐다. 다윗은 지혜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막내인데다 몸집도 작고, 여러모로 부족했기에 주변에 좋은 사람을 두어 그 약점을 보완했다. 그래서 더 강해졌다. 바울도 그랬다. 몸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고 하시며 그 가시를 몸에 남겨두셨다. 그게 바울을 더 긴장하고 더 기도하며 사역하게 했을 것이고. 복음의 능력이 더 강하게 드러나게 했다. 조개 속의 진주도 상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 그대로였다. 


압살롬의 아름다움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풍성하고 아름다워 연말에 한 번씩 머리털을 자르는데 그 무게가 200세겔, 대략 2kg이었다. 긴 머리가 자랑거리인데 압살롬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이 바로 그 머리털이었다(18:9). 


압살롬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이 머리털 때문에 나무에 대롱대롱 달린 압살롬을 보고 요압에게 알린다. 그런데 요압은 왜 죽이지 않았냐며 만일 죽였으면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줬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은 천 개를 받더라도 왕의 아들을 손댈 수는 없다고 했지만 요압은 직접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18:14). 아름다운 머리털이 문제였다.


반란을 일으키는 압살롬
다윗은 압살롬의 예루살렘 거주는 허락하지만 만나주지는 않고(24절), 찾아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었을까? 무려 2년이나 그렇게 지냈다(28절). 


다윗은 왜 그토록 압살롬을 모질게 대했을까? 증오심일까? 아마 그건 아닐 것 같다. 다윗은 분명 압살롬을 보고 싶어 했다(13:39). 그러나 마음이 복잡했던 모양이다. 보고 싶다가도 막상 보면 암논 생각이 날 것만 같은 것, 이해가 되지 않나? 


물론 살인죄에 대한 책임과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것도 압살롬을 위한 아비의 마음이니까.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그건 자기 합리화 아닐까? 어쩌면 다윗에게 용서를 거절하고 은혜와 자리 베풀기를 거절하는 독한 마음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 이 또한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한 그의 죄 아닐까? 


다윗은 압살롬을 화끈하게 용서하지 못했다. 그저 법적 사면 정도랄까? 아버지로서의 통 큰 포용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압살롬이 경험한 것은 아버지의 거절이었다. 무정한 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압살롬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였을 뿐, 아마 집에 있어도 집에 있는 게 아니었고, 살면서도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무려 2년 동안 변함이 없자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른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극단적인 액션이었다. 기대대로 요압이 달려왔다. 압살롬은 “차라리 그술에 있게 놔두지 왜 불렀느냐? 죄를 물어 죽이든지, 이게 뭐냐?”며 “왕의 얼굴 좀 보게 해달라”고 한다. 그만큼 압살롬은 용납받기 원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다. 


결국 요압의 중재로(사실은 다윗에게 간청한 것) 압살롬과 다윗의 화해를 위한 재회가 이루어진다(33절). 그러나 압살롬은 아들로 인정받기는 하지만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것이라기보다 왕이 압살롬을 부른 것만 같다. 대화를 보면 ‘아버지’라는 말은 없고 ‘왕’이라는 말만 반복된다. 더 이상 부자관계가 아니라 권력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압살롬은 재기의 기회를 잡고도 딴생각을 한다. 아버지 다윗에 대한 쓴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결국 반란을 계획한다. 당한 만큼 갚아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아버지의 태도를 부당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어진 기회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틀었다. 그리고 왕권 찬탈을 위한 과정을 밟기 시작한다.


병력부터 장악했다. 아버지 다윗과 파워게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왕이 할 재판을 자신이 대신하면서 재판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안아주며 그들의 마음을 훔친 것이다. 4년을 그렇게 한 것,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압살롬은 하나님을 이용해 전국을 장악했다. 헤브론으로 내려가 다윗이 왕권을 잡았던 순서를 그대로 밟아갔다. 전국 모든 지파에 정탐들을 보내 나팔을 불면 전국적으로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압살롬 만세”를 외치게 했다(15:10).


이렇게 압살롬은 사병을 기르고, 국민 마음을 사고, 정탐들을 전국에 보내고, 200명의 응원부대와 다윗의 책사마저 끌어들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정권 찬탈을 위한 완벽한 계획, 순간 욱하는 마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말이다.


드디어 다윗의 허약한 정치기반을 파고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민심도 완전히 돌아섰다. 하지만 ‘평화의 아비’라는 이름 뜻을 가진 압살롬이 평화의 길이 아니라 탐욕의 길로 간 것, 이걸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물론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12:10~11), 다윗이 우리야에게 행한 잘못에 대한 벌로 이렇게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가족 간의 사랑도 버리고, 나라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압살롬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셨다. 마치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양 전쟁까지 일으킨 것을 압살롬의 잘못이자, 그의 책임으로 여기신 셈이다. 압살롬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다윗을 이기게 하셨다. 그리고 내부의 저항 세력을 확인하고 제거하면서 통일국가의 기초를 오히려 더 탄탄하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