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랄 로버츠의 신유은사 강조
오순절운동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랄 로버츠에 의해 불붙은 신유은사 집회의 대성공 때문이었다. 그는 1950년대 중반에는 오클라호마 주 오순절 성결교회 출신의 한 무명 복음 전도자에 불과한 목회자였지만, 이제 텔레비전을 통해 복음전파를 시도한 최초의 신유사역자가 되어 미국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자 1960년대 초까지 수백만 명의 미국 사람들은 자기 집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오랄 로버츠 목사의 신유사역을 지켜보면서 오순절주의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됐다.
한편 로마가톨릭교회의 주교들은 오랄 로버츠의 은사집회가 미국 전역의 천주교 성도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이라는 책과 오랄 로버츠 목사의 전기를 쓴 알칸소 대학의 데이빗 헤럴은 오랄 로버츠 목사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종교인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오랄 로버츠 목사는 1965년 오랄 로버츠 대학을 설립했고, 1980년대에는 “믿음의 도시”라는 병원을 개원함으로 1960년대 이후에 떠오른 은사 운동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평가됐다.
치유사역의 신학적 기반으로서 기도와 믿음
그런데 오랄 로버츠의 이같은 치유사역은 그보다 먼저 생존하며 이러한 사역을 강조했던 찰스 피니와 찰스 컬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일찍이 믿음의 치유문제에 대해서는 부흥사 피니가 “효과적인 기도”를 주장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바가 있다.
그의 부흥운동 가운데 회심을 위한 기도의 실천이 있었다. 그의 스타일의 특징은 부흥을 이루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사람의 실패 때문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피니는 기도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며, 또한 기도자는 축복을 받기를 기대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피니는 “신앙은 언제나 목적을 달성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랄 로버츠는 컬리스에게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컬리스는 성공회 신자였으며 보스턴에 있는 동종요법 의사로서 지난 세기에 믿음의 치유에 대해 주장하면서 교회의 주목을 끌었던 사람이다. 그는 부인의 죽음을 맞자 이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보다 나은 심령과 보다 나은 영적인 생활추구에 눈을 돌리게 됐다. 그는 1862년 8월 19일에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을 읽다가 온전한 성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본문말씀을 붙잡고 “성령으로 나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옵시고 내 마음속의 모든 이기심과 불신앙을 없애주소서”라고 기도했다.
데이비드 듀 플레시스의 성령 이해
신 오순절운동의 확산에 기여한 공로자이자 대변자인 사람은 데이비드 듀 플레시스(David Du Plessis)이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천주교의 박해를 받아 남아프리카로 피난 온 위그노의 후손으로서 “사도적 신앙 선교회”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오순절교회에서 회심했다. 1936년 데이비드 듀 플레시스는 유명한 복음전도자인 스미스 위글워스의 예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1951년에 세계교회협의회 대표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에 세계교회협의회를 방문한 이후, 프린스턴 신학교 교장인 존 맥케이와의 만남을 통해 전통적인 기성교회가 오순절교회와의 만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데이비드 듀플레시스는 1954년에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두 번째 총회에 오순절 교회의 대표로 초청됐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오순절교단의 다른 지도자들로 하여금 격노를 사게 됐다. 그는 교단 지도자들로부터 절차를 무시하고 행동을 한 독불장군으로 낙인이 찍혀 마침내 “하나님의 성회”교단으로부터 출교를 당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