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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용사들 (삼하23:1~39)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45

가끔 인생의 마지막을 어떤 말로 끝낼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아마 화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로 인생을 끝마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왕이면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하고 다시 만나자며 삶을 마치고 싶어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평소의 언어 습관이다. 왜냐하면 그 습관이 마지막 말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본문의 앞부분은 다윗 왕의 마지막 말이다.


다윗의 찬양
7절까지 이어진 다윗의 마지막 말은 찬양이었다.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마치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 같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1절), 다윗의 자신의 묘비명이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또는 자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을 했다. 


먼저 ‘이새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족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이새, 지금의 자신은 ‘가문의 영광’이랄까? 별 볼 일 없던 존재, 미천한 존재였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다윗을 끔찍이 미워했던 사울 왕도 아들 요나단에게 “이놈아! 이새의 아들 다윗을 없애라! 그래야 네가 왕이 될 수 있어!” ‘이새의 아들’이라고 다윗을 낮춰 불렀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이 말을 한다. 다윗답다.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를 소개한 거다. 여덟 아들 중 막내, 양 치는 목동, 왕이 될 자격이나 여건은 단 1도 없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려고 왔을 때도 아버지 이새는 일곱 아들만 부르고 다윗을 괄호 밖 아들로 취급했다. 집합 명단에도 없던 다윗, 그가 왕이 됐다. 


그리고 왕으로서 인생의 마지막 말을 하는데 그 고백에 세 가지 수식어가 붙었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세 번째가 좀 특이하다. 최고 실력자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안에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차 있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수많은 시편을 쓰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노래하는 것’이 취미, 수금 연주도 좋아했다. 그 취미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과 장래에도 인도하실 하나님을 찬양했다. 얼마나 찬양에 푹 빠졌던지, 얼마나 자주 연주를 했던지 소년 시절 사울 왕이 악령에 시달릴 때 그가 수금을 타면 악령이 떠날 정도의 실력자가 됐다. 그만큼 충만했던 것, 그래서 부르고 또 부르고 연주하고 또 연주하다 보니 시편 150편의 절반 정도가 ‘다윗의 시’라는 이름으로 헌정됐다.


우리의 찬양도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야 한다. 많이 가져서 하는 것이 아니다. 높이 올라가서 하는 것도 아니다. 시작이 제로였다는 사실, 바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는 거다. “나는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 이런 자세라야 찬양이 취미 될 수 있다. 자꾸 욕하면 욕쟁이 되고, 자꾸 거짓말하면 거짓말쟁이 되고, 자꾸 도둑질하면 도둑이 되듯 자꾸 노래하면 노래를 잘하게 된다. 


‘단테 신곡 강의’(2008.1)란 책이 있는데 단테가 쓴 책이 아니고 이마미치 도모노부가 쓴 신곡 강해서다. 전공자도 아니다. 철학을 전공했는데 단테의 ‘신곡’을 너무 좋아해서 매주 토요일 밤, 세 시간씩 무려 50년 동안 ‘신곡’을 연구했다. 노트들이 쌓여 갔다. 그 시간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무슨 비밀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70세가 넘은 나이에 ‘신곡’을 강의하게 됐고, 그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 ‘단테 신곡 강의’라는 책이 됐다. 


누구에게든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게 영혼을 풍요롭게 만든다. 다윗은 수금타기와 찬양이 취미였고 즐거움이었다. 자신은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그의 말씀이 자기 혀에 있다고 노래한다(2).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쩌다가 만들어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 하나님께서 만드신 축복이라는 고백, 다윗은 이 성령의 역사가 자신의 인생을 이끌었다는 고백을 유언으로 남겼다. 멋진 표현 아닌가?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다’, 말씀은 살아있는 능력,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자 하늘의 지혜를 담은 보고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수많은 시편을 만들어냈다. 감동된 그의 행동과 그의 말들! 권위가 있고 생명력이 있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다윗은 4절에서 자신이 ‘돋는 해의 아침 빛 같을 것’이라 했다. 힘 있고 뜨거울 것이라는 말이다. 또 ‘구름 없는 아침’이라 했다. 날씨 너무 좋다고, 상쾌하다고 느낄 만하다는 거다. 그리고 ‘비 내린 후 움 돋는 새 풀 같을 것’이라 했다. 젊고 새로울 것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6절에서는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무지와 완고함으로 가득 차 있다면 가시나무와 같을 것이라 했다. 쓸모없고 다른 사람을 쏘기만 하고 결국은 꺾여서 불태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마지막을 멋진 찬양으로 장식하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37인의 용사들
이어서 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다윗의 용사들 명단이다. 마치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의 예수님의 족보처럼, 또 로마서 16장의 교회 일꾼들 명단처럼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과 우리아의 아내가 들어있고, 일꾼 명단에는 남자, 여자, 젊은이, 늙은이, 싱글, 부부, 귀족, 노예, 사업가, 공직자, 유식한 자, 무식한 자가 들어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든 어떤 사람이든 은혜받으면 일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다윗의 용사들은 남자만 총 37명이다. 다윗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통일왕국을 이루었던 37인의 용사들, 성경은 그 영웅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며 업적을 기린다. 분량이 얼마든 너무도 소중한 이름들이다. 이름이 그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쩌면 이름 하나 잘 남기기 위해 살고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어떤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먼저 거론되는 세 용사의 이름은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였다(8~17). 사무엘서에서 처음 듣는 이름들인데 이들의 용맹이 대단하다. 아디노라고도 하는 요셉밧세벳은 혼자서 적 800명을 죽였다고 한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비, 조자룡 같은 세 용사,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기억하신 세 용사, 그들의 다윗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였다. 블레셋과 싸우는 데 전쟁 중에 갑자기 다윗이 고향 땅에서 먹던 성문 옆 우물물이 생각나 혼자 말로 “누가 그 물을 내게 마시게 할꼬”라고 하자 지체없이 달려가 우물물을 떠온다. 20km쯤 떨어진 베들레헴에 목숨을 걸고 다녀온 거다. 성경은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 그들의 삶 전부를 담은 핏잔으로 여긴다(17). 다윗은 차마 마실 수 없었다. 이른 새벽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슬 젖은 땅에 무릎 꿇고 세 용사와 함께 그들이 들고 온 그 핏잔을 하나님께 부어드린다.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아름다운 곳도 아니고, 수천의 소떼와 양떼를 번제물로 드렸던 희생 제사도 아니지만 그날 드린 한 잔의 물은 다윗과 세 용사가 드린 최고의 예물이었다. 감격과 눈물이 있는 인생 최고의 예배였다.


이어서 나오는 30인의 용사들, 성경은 그들의 용맹함과 더불어 그 출신을 언급했다. 모두가 빛나는 이름들, 영롱한 보석 같은 존재들이다. 흠이 많은 다윗, 결정적인 잘못을 범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기에 목숨을 걸고 함께한 사람들이다. 성경은 그들의 공로를 잊지 않고 37명 용사들의 명단을 남겼다.


그런데 이 명단에 요압의 이름이 없다. 통일왕국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군이지만 다윗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을 위해 싸웠다. 자기 자리가 위태로우면 적을 치고, 라이벌은 다윗의 명령도 없이 죽였다. 그래서 다윗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요압은 명단에 없다. 그리고 명단 제일 마지막에 우리아가 있다(39). 다윗에 의해 불의의 죽임을 당한 사람, 다윗이 그토록 지우고 싶은 이름, 그 이름이 들어있다.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셨다는 뜻이다. 불꽃 같은 눈으로 그발 강가의 에스겔을 보셨던 하나님이 우리아를 못 보셨을 리 없다. 하나님은 우리도 보고 계신다. 다 보고 계신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용사들이 등장한다. 아벨로부터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과 사무엘 등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들을 믿음의 렌즈로 재조명한 것이다. 그리고 12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 명예의 전당에 먼저 올라간 믿음의 선배들이 그 전당에서 지금 인생의 경주를 하는 우리를 응원한다는 말씀이다. 다윗의 37명 용사들의 이름처럼 우리의 이름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하늘나라 명예의 전당에서 불리게 될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리라”(계3:5). 생명책에 영광스럽게 올려져 빛을 발할 우리 이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든 끝까지 충성하는 믿음의 용사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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