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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펜윅과 대한기독교회의 복음주의 신앙과 항일활동과의 관계

말콤 펜윅 다시보기-2
김용국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교회사)

폴링은 강경 출신 포목장사꾼 지병석을 전도해 1895년 여름 한강에서 침례를 베풀었고, 지병석의 권고를 받아들여 충청도로 선교지를 옮기기로 했다. 폴링은 강경과 공주에 선교 본부를 마련했고, 1896년 2월 9일에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교회를 세웠다. 1896년 4월 프레더릭 스테드맨(Frederick W. Steadman), 새디 에클스(Sadie Ackles), 알마 엘머(Arma Ellmer) 등 제2진 엘라씽선교사들이 내한하여 가세했다. 서울 내자동 선교 본부는 미남감리교 선교부에 매각했고, 감리교 선교부는 그곳에서 1898년 10월 배화학당을 시작했다. 씽 집사가 1900년 사망한 후 상속인들은 선교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 결과 엘라씽선교회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1901년 4월 한국선교를 종료하고, 펜윅에게 재산과 사역을 이양했다. 1906년에 이르러 전국에 31개의 교회들이 존재했고, 교회들은 그해 10월 6일 강경교회에서 제1차 대화회(총회)를 개최하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했다. 대한기독교회는 교단명을 여러 차례 바꿨다. 일본이 “대한”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자, 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했다. 1933년에 ‘성별된 무리’를 뜻하는 대(隊)로 바꾸자는 펜윅의 요청에 따라 “동아기독대”로 바꿨다. 1940년에 교단명을 “동아기독교”로 바꿨다. 동아기독교는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이 천황을 모독하고, 국체명징(國體明徵)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1944년 5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됐다. 


대한기독교회가 불참한 민족운동  
대한기독교회는 펜윅의 영향으로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펜윅은 철저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로서 교단으로 하여금 사회적 참여보다는 영혼구원에 집중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교인들에게 애국을 강조했고, 성경적 신앙과 신앙의 자유 및 정교분리 사상을 가르쳤다. 그 결과 대한기독교회는 애국주의, 영혼구원의 우선성, 성경주의 신앙,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 등으로 무장됐고, 이러한 원리들을 일본의 통치에 반응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교단은 일제가 신앙 원리에 배치되는 것을 강요할 경우 결연히 반대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급적 정치‧사회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복음전파에만 집중했다.


대한기독교회는 이러한 기준에 따라 몇 가지 중요한 민족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첫째,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일부 기독교인들이 동참한 대한자강회와 국채보상운동에 함께하지 않았다. 대한자강회는 국권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의식적인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기독교 신앙이 전파된 지역에서 보다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그런 지역에서 3‧1운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대한기독교회는 대한자강회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직접적인 복음전파에 시간과 힘을 사용했다. 둘째, 1907년 4월경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민회에 대한기독교회는 참여하지 않았다. 신민회는 교육진흥과 상공업 중흥을 통한 독립 기반 마련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해 무력 독립을 이루려 했던 의도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셋째, 신민회와 관련된 1911년의 105인 사건에도 대한기독교회는 관여하지 않았다.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이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할 때, 신민회원들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암살을 모의했고 외국인 선교사들은 배후에서 사주했다는 날조된 사건을 근거로, 관서 지방의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 지도자 500여 명을 검거 투옥하고, 이들 중 123명을 기소하여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투옥된 123명 중 기독교인이 91명으로 전체의 74%를 차지했는데, “장로교 80인, 감리교 7인, 조합교 2인, 기타 2인”이었다.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의 허위성과 잔악함을 세계에 알렸고, 이에 국제적 압박을 받게 된 일제는 2심에서 105인 중 99명을 무죄 석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교를 통해 독립을 추구하는 외교독립론이 나타났고, 기독 청년들이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등 항일의식이 강화됐다. 기소된 91명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대한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 교단은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보다 복음전파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한기독교회는 넷째로 1919년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3‧1운동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시작됐다.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에 입각해 각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려 했다. 미국의 한인 교포 기독교인들은 크게 호응해 1918년 11월 한국의 독립 청원서를 윌슨에게 보냈다. 민족자결주의는 중국과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중국 상해의 한국 기독 청년들은 1918년 11월 신한청년단을 조직한 후, 윌슨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냈으며,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은 2‧8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국외의 노력들은 국내에 영향을 끼쳤고 곧 3‧1운동이 일어났다. “3‧1독립선언서”는 인도주의,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독립국을 표방하고, 비폭력 무저항 원칙을 지향했다. 3‧1운동 관련 “피검자 1만 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3426명으로 전체의 17.6%”에 해당하는데, 당시 기독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2%에도 못 미쳤던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대한기독교회는 불행하게도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펜윅의 영향으로 교단은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대한기독교회의 복음주의 신앙에 입각한 항일활동   
펜윅과 대한기독교회는 이처럼 의도적인 항일운동이나 독립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종 일제의 통치에 항거했는데, 그것은 복음주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애국주의 역시 바탕에 있었다. 복음적 신앙을 고수하는 것과 애국주의, 이 두 가지가 항일활동의 원동력이었다. 펜윅은 대한기독교인들에게 모세나 바울처럼 조국을 사랑해야 하며,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도 잘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약탈에 분개하고 교인들에게 한민족의 전통과 얼을 일깨워주려 했다. 예를 들어 어떤 교인이 검정 옷을 입고 교회에 오자, 펜윅은 “그대는 일본 사람 같소”라고 말하며 흰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면했다. 펜윅은 한국의 문화와 예절을 무척 좋아했으며, 자신이 편위익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런데 애국주의를 주장하면서 민족운동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모순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펜윅과 교단이 성경주의, 영혼구원의 우선성,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 등의 신앙 원리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이 직접적으로 도전받지 않은 경우에는 가급적 정치‧사회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교단은 그러나 복음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차원에서는 적극적으로 항일활동을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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