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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비움(왕상 1:1~4)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47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다윗의 말년 모습은 한 마디로 ‘비움’이었다. 불교나 뉴에이지 사상에서 강조하는 비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비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이 목적이다. 비움에 초점을 맞춰 다윗의 아름다운 마지막을 정리해본다.

 

위대한 다윗, 정리가 필요하다
사무엘서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가 열왕기상 앞부분까지 연결되어 다윗이 죽고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말년을 맞은 다윗, 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존경하는 왕 중의 왕이다.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고,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죽이던 그 참혹한 시절에도 유대인들이 가슴에 다윗의 별을 붙이고 다니며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했을 만큼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존재다. 성경도 그를 최고의 인물로 인정한다. 심지어 신약의 첫 절, 예수님을 소개하는 시작 부분에 딱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다윗이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평가를 받는 다윗이지만, 그의 생애 모두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니 아름답기는커녕 너무 부끄러워 꼭 지우고 싶은 순간들도 있다. 정리가 필요하다.


파란만장했지만 크게 성공한 최고의 인물,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일개 목동이 이스라엘의 왕이 됐다. 시시한 왕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연 독보적인 왕이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다 얻을 수 있을 정도랄까? 권력도 얻고, 명예도 얻고, 영광도 얻고, 재력도 얻었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인들이다. 미갈로부터 아비가일, 아히노암은 물론 왕이 된 후에도 많은 아내들을 얻었다.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소실, 첩을 더 얻었다고 했다. 이는 다윗의 성공을 반영하는 증거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렇게 아내를 많이 얻은 것이 꼭 성공을 보여주는 증거만은 아니다. 그가 욕망의 사람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왕이라고 해서, 성공했다고 해서 아내가 꼭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어두운 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인생을 망가지게 만드는 주범, 그는 욕망 때문에 인생이 꼬인 사람이다. 욕망에는 계단이 있다. 그 첫 계단은 조심스럽게 조금씩 밟아간다. 그때는 욕망을 충족해도 합법적으로 충족한다. 하지만 다음 계단에 올라서면 완전 달라진다. 눈이 뒤집힌다고 할까? 욕망이 자라서 그의 판단력과 의지를 마비시키는 단계다. 그때는 컨트롤이 안된다. 그리고 그 다음 계단에 오르면 욕망이 그를 움직인다. 아예 욕망의 노예가 되는 거다. 그때부터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놓고 욕망을 추구한다. 불법도, 죄악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망가진 인생이 되는 거다. 


이런 비극적 욕망의 가장 높은 계단에 오른 사람이 다윗이다. 지우고 싶은 죄를 범했다. 밧세바 사건, 그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사건이다. 간음죄, 모르는 여인도 아니고 자기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우는 충신 우리야의 아내다. 수습과정도 기가 차다. 어이가 없다. 남편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내몰아 적군의 칼에 죽게 한다. 그리고 과부 밧세바를 합법적으로 아내 되게 한다. 또 한 명의 아내를 더 얻은 것, 아내가 없어서 그랬나? 아니다. 이미 아내들은 많았다. 그것도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들이다. 


그런데도 다윗이 이런 짓을 한 것은 욕망의 브레이크가 파열됐기 때문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했다. 살인 교사까지 하며 밧세바를 빼앗았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던가? 다윗이 그랬다.


결국 모든 과정을 보셨던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 죄를 지적하셨다. 다윗은 눈물로 회개한다. 용서는 받지만 죄의 대가가 끔찍하다. 집안에 비극적 사건이 연속된다. 큰아들 암논은 여동생 다말을 겁탈하고,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은 여동생 복수를 위해 암논을 죽인다. 그리고 몇 년 후 반란을 일으켜 다윗이 피난을 간다. 천신만고 끝에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압살롬이 죽는다. 이 일들이 밧세바와의 그 일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복귀는 하지만 가정이 엉망이다. 너무 치욕적, 인생이 전체적으로 망가졌다. 참으로 영광스럽던 왕좌였는데 욕망 때문에 그만 부끄러운 자리가 되고 말았다. 그의 말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리따운 여인 아비삭의 등장 
열왕기상의 시작은 예상외로 전쟁 기사나 정권 교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 것,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생애를 마무리 짓는 데 꼭 필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등장 이유는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1절). 전쟁터를 누비던 영웅도 늙어 가는 몸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두껍고 좋은 이불을 덮어도 춥다. 신하들은 왕을 기쁘게 하려고 왕과 함께 누워 잘 젊은 여인을 구했다. 그 여인이 바로 절색의 미인 아비삭, 수넴여인이다.


성경은 이 여인을 ‘아리따운 여인’이라 했다. ‘아리따운 처녀’(3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4절), ‘심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때 사용되었던 최상급의 표현, 대단한 미모의 여인이라는 말이다. 


미모의 여인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뭇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다. 성경에 그런 미인들이 꽤 등장하는데 사라, 라헬, 에스더 등이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아비삭도 그런 미인, 이스라엘 전역에서 고르고 고른 ‘미스 이스라엘 진’ 같은 최고의 미녀, 그 아비삭이 ‘아름다운 처녀 치료법’으로 선택됐다. 요즘은 아비삭의 등장을 나이 든 왕의 정력을 회복시켜 보려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노력의 일환 정도로 해석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유진 피터슨은 “아비삭은 다윗의 임종을 둘러싼 암흑과 혼란 속에서도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이라 했다. 집안이 온통 싸움판일 때 오직 섬기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고, 섬기는 것으로 만족한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치유책으로는 실패했지만 계속 다윗 곁을 지킨 사람, 다윗이 죽어갈 때 신하들과 아들 아도니야, 아내 밧세바가 차례로 다 다윗을 버려도 조용히 그리고 아름답게 끝까지 다윗 곁을 지켜준 사람이 바로 아비삭이었다. 


버림으로써 회복된 다윗다움
그런데 아비삭을 맞이한 다윗의 태도가 예전과 다르다. 다윗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이불 속에 들어와 시중을 들어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4절). 일흔 살 다윗의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도록 정력을 회복하라고 신하들이 시중을 들게 한 여인을 거절한다는 것, 쉬운 일인가? 그런데 다윗이 그 아비삭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 ‘다윗의 비움’이다. 성경은 사람이 많이 얻거나 원하는 것을 손에 쥐는 순간에 인생이 완성되기보다 오히려 ‘비우는 순간’에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전의 다윗이었다면 틀림없이 아비삭을 품에 안았겠지만 “아비삭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 하였더라” 만일 이 말씀이 없었다면 다윗도 그저 그런 사람이었을 뿐, 욕망 따라 움켜쥐기만 한 사람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이 한 구절로 인해 “과연 다윗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윗다움이 회복되게 한 말씀이다.


물질 만능시대를 사는 우리는 사실 많이 얻어서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포로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하며 살고 있지 않나? 아합 왕이 그랬다. 이미 좋은 것을 다 가지고도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다. 결국 아내 이세벨과 공모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아내 이세벨과 함께 개밥 신세가 되고 만다.


다윗은 끝이 좋았다. 만약 다윗이 아비삭과 잠자리를 같이 하다가 얼마 후에 죽었다면 젊고 아리따운 아비삭의 인생은 비극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다윗이 비움으로써 아리따운 여인 아비삭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이 일은 다윗에게는 과거의 수치를 씻는 기쁨을 주고, 아비삭에게는 삶을 귀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이게 바로 다윗 인생의 절정인 것 같다. 흔히 다윗 생애의 절정을 골리앗을 이겼을 때나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을 뿌리치고 살아남아 왕위에 등극했을 때로 여기지만 아니다. 성막을 짓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오던 때도 아니다. 그의 인생의 절정,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비움의 기쁨’을 느낀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아리따운 절세가인을 방 밖으로 내보내는 바로 이 순간, 다윗은 비로소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한 사람의 성숙한 신앙인, 과연 다윗답게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됐다.


이제 밧세바와 관련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본래 어린 시절 베들레헴의 목동으로서 양떼를 몰고 풀피리를 불면서 수금을 타던 그 시절의 아무 욕심 없던 해맑은 소년 다윗이 회복됐다. 욕망 따라 살던 긴 세월, 그 고단한 삶, 얻고도 만족이 없던 삶, 더 많이 얻고자 몸부림치던 피곤한 삶은 이제 끝났다. 아비삭과 잠자리를 거부하는 순간, 예전의 베들레헴의 소년, 양떼를 몰고 수금을 타던 해맑은 소년 다윗의 시절로 되돌아간 것이다. 비우고 순수의 시대로 돌아간 것, 그곳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고,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요, 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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