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에서 구원과 윤리에 대한 부분만 오류가 없고 나머지 비종교적 부분, 즉 역사적, 자연 현상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있다고 믿는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오성주의자(infallibilist)라고 부른다. 그러나 불오성(infallibility)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오류를 발생시킬 수 없는 것’(unability to err)이다. 그렇다면 불오성은 오류의 현존이 없다는 무오성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으로서 오류가 절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무오한 문장을 진술한다. 자신의 직업, 나이, 이름, 거주지에 대해 정확 무오한 진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무오성이 우리가 어떤 문장을 진술할 때 불오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오류가 섞인 진술을 하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거짓된 진술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오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오한 존재라면 결과적으로 언제나 무오한 진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불오성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 역사에서 두 개념은 오랫동안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되어 오다가 제한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소위 불오성주의자들의 등장으로 무오성과 불오성이 나뉘어 사용됐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오성과 무오성은 개념상 구분될 수는 있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제한된 무오성은 많은 신학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역사적, 자연 현상에 대한 일반적 진술에서 이미 오류를 발생시킨 성경이 매우 고차원의 형이상학적 주제(삼위일체, 성육신, 구원 등)에 대해선 무오한 진술을 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제한된 무오성은 성경의 부분적 권위만 인정함으로써 성경의 독자에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무엇이 거짓된 것이며 참된 것인지를 구분할 의무를 부과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제한된 무오성은 진리 판단에 있어서 모든 성경이 무오하다는 성령의 증언이 아니라 인간 이성이 최종 권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진리와 반대되는 명백한 오류로 보이는 것이 나타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는 그 원인이 사본의 문제이거나 혹은 번역가의 오류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이해 부족 중 하나로 보아야지 성경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Augustine, Letter 82.3).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은 예수님에 의해 확증됐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롯의 아내에 대한 심판, 노아의 홍수,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 등에 대한 구약의 진술을 역사적인 참된 진술로 취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고대 도시들에 대한 고고학계의 설명이나 인류의 기원에 대한 과학계의 묘사가 성경 자체의 진술과 다르다고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고고학계나 과학계의 주요 학설은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이 배제된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연구자들은 세상의 최초 창조 순간이나 여리고 성이 무너진 때 바로 그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어떤 파편적 유물들을 기초로 여러 가설을 세우며 현 자연계의 조건으로 창조 순간을 추측한다. 그러므로 고고학계나 과학계의 학설들이 시대가 지나면서 사라지거나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성경의 신학은 그 신학이 형성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 위에서 주어진 것이다. 홍해 사건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거나 여리고 성벽이 실제로 갑작스럽게 무너짐을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을 통해 성경의 신론, 기독론, 구원론등이 형성됐다.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에 대한 보고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벧후 1:16)라고 강조한다. 성경 저자들은 비유나 환상의 기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신학을 전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