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는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해 총 24명이 타고 있었는데, 불길을 피해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배에 불이 나기 전에 토마스 선교사는 한문 성경을 평양 군민에게 던져 주며 조선어로 “야소(예수)를 믿으세요!”라며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던진 한문 성경을 12살의 어린 소년 최치량이 3권을 습득해 평양성 관리인 박영식에게 줬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평양 복음의 초석이 된 인물들이 된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 승조원들을 생포해 협상의 카드로 쓰려고 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는 처형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음이 목전임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관민들에게 성경을 나눠 줬다.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그러나 그에겐 두려움이 없이 주변에 있는 평양 관민들에게 ‘야소(예수)를 믿으세요!’라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조선에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조국의 대적들의 처형을 맡은 것은, 제너럴셔먼호에 붙잡혀 감금된 무관 이현익의 부하 박춘권이었다. 나중에 그는 이현익을 구출하고 제너럴셔먼호 전멸작전에 공을 세워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하게 됐는데, 박춘권은 순교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서양사람 중 한 사람을 죽였는데,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느낌이 있다. 내가 그를 베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웃으면서 어떤 책을 나에게 건네며 받으라고 했다. 물론 내가 그를 죽이기는 했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집에 가져왔다.”
훗날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받은 성경을 읽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30년 뒤 60대에 마펫 선교사(평양신학교 설립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1899년 침례를 받아 남은 인생을 복음 전파와 교회를 섬겼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했지만, 그가 한국교회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타면서 미국은 조선에 변상을 요구했고, 이것은 훗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 덕분에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파울링,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등 수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또한 그가 배에서 평양 관민(군민, 백성)들에게 던지고, 전해준 성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복음에서 복음을 낳게 됐다.
그의 선교 활동이 짧고, 업적과 행적이 없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으로는 실패라고 얘기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실패가 아닌 성공이었다. 우리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성숙한 모습이 있어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인류를 구원한 예수님의 피가 있듯이, 토마스 선교사의 피는 조선을 구원했던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과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밀알이 됐다. 우리도 세상에서 목사이기 이전에 신앙인으로 살면서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밀알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행동으로, 원래의 의미와 힘을 상실했던 이름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뢰를 떨어뜨리는 말들을 회복시키는데 있어, 가장 시급하게 행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교회 이름이다. 교회 이름을 아름답고 멋지게 짓는 것보다. 그 이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이 중요하다. 그것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순교자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