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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본적인 힘

박종화 목사의 가정사역-26
박종화 목사
빛과사랑교회

인천은 구시가지에 오거리가 많고 길이 구부러진 곳이 많다. 우리집도 구시가지에 있어 집에서 나오거나 들어갈 때 구부러진 길로 다닌다. 내가 구부러진 길을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길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이 구부러진 길이란 것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구부러진 산길의 정취는 기쁨이고, 회색 도시의 반듯한 길은 지루하다.


나는 내가 구부러진 길이 싫으면 반듯한 길로 가면 되고, 반듯한 길이 지루하면 구부러진 길을 선택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인간이 가져야만 할 선택의 자유다. 이제는 반듯한 길과 구부러진 길이 조화를 이룬 곳으로 이사를 해야겠다. 


가족치료사인 버지니아 새티어(Virginia Satir)는 기능적인 가족 안에서 개인은 다섯 가지 자유를 자질로 갖게 된다고 했다.

 

1. 과거에 있었으며 앞으로 있거나 있어야만 하는 것 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보고 들을(지각할) 수 있는 자유.
2. 생각해야만 하는 것 보다 생각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유.
3. 느껴야만 하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자유.
4. 허락을 받으려고 기다리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을 물어 볼 수 있는 자유.
5. 안전을 선택해 항상 조심하는 것보다 자신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자유.

 

어느 책의 제목인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문구는 느낌상 그다지 유쾌한 문장이 되지 못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또 그 목적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을 하고 시간을 아껴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목적이 나의 자유를 통제하게 되면 그 목적은 현재의 자기 느낌과 감정을 잃은 채로 수치심을 가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또한 목적을 위해 강박적인 열심과 완벽한 성취를 위해 자기가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고 스스로 통제당할 수 있으며 주위의 다른 사람(특히 자신보다 힘이 약한)과는 옳은 일로 관계하지만 경계선이 불분명한 밀착, 융합, 갈등의 관계로 역기능이 유지되거나 서로에게 의존하는 상호의존중독이 될 수도 있다. 주로 역기능적으로 완벽과 옳은 일을 추구하는 내담자에게 ‘당신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사람보다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중심의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화를 내며 ‘아니요 나는 일 보다는 사람을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랍니다’라고 항변한다.


상담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처 입은 일중심의 내담자는 삶과 사람 사이에서 위 다섯 가지 자유가 부족하다. 또한 현재 자신이 상대방과 감정과 느낌을 나누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일에 극히 서투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당사자는 단지 자신의 일이 사람을 위한 일이기에 자신은 일중심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 내적 자유를 잃어버렸다면 거짓 자기가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역기능에서의 열심을 강박적 열심이라 부른다.


가끔 부모가 아이들에게 묻는 말이 있다.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아이의 반응은 여러 가지다. ‘아빠가 좋아요’ 또는 ‘엄마가 좋아요’ 아니면 ‘둘 다 좋아요’ 그러면 다시 물어본다. ‘둘 다 좋아도 그 중에서 누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 아이는 어느새 눈치를 본다.


부모 중에 어느 한 쪽이 더 좋다는 것은 건강한 아이로서 자신의 비교와 판단을 통한 선택일 수 있다. 아빠가 주로 일을 나가면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기에 엄마의 사랑을 더 받게 되고 엄마가 더 좋다고 느껴지면 아빠 앞에서도 엄마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해도 아이는 아빠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 부모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생각이나 느낌을 통제하지 않게 되며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며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자율적으로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엄마가 더 좋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역기능적인 체계에서는 부모의 관계가 사랑의 건강한 관계가 되지 못하기에 자녀는 부모의 눈치를 보게 된다. 부모와 자녀 사이는 역기능의 삼각체계가 형성돼 부모 중에 어느 한쪽이 배우자에게서 받을 사랑을 자녀를 통해 받으려 한다. 그렇게 자녀와 부모 중 한 쪽이 밀착이 된다. 이런 경우 아이는 부모의 관계로부터 이중 메시지를 경험하게 되기에 부모의 눈치를 보게 된다. 눈치를 본다는 의미는 이미 부모의 역기능적인 통제를 받는다는 말이다. 


상처가 해결이 안 된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빠가 아내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자녀에게 효도를 원하는 것처럼 역기능적인 것은 없다. 남편의 사랑,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한 가운데서의 순종과 효도에 대한 강요는 역기능적인 통제다. 서로에게서 인격이 존중되고 배려하며 이해하는 소통이 금지됐기에 일방적인 강요는 폭력과도 같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효도하라는 아빠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자녀가 아빠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는데도 사랑을 하라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는 말과도 같으며 이러한 정신적인 상처는 자녀의 정신세계를 혼동시키며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자녀 보다는 부모의 개별적이고도 관계적인 치료를 먼저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부모가 치유되면 자녀는 저절로 치유된다. 


사실 부모 중에 누가 더 좋은지 모르는 아이가 행복한 아이다. 부모가 서로 사랑해 한 몸 됨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자녀의 필요를 채우고 사랑하기에 누가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를 나누어 생각할 수 없고, 부모가 동시에 좋고, 다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한 가족은 한 생명 덩어리가 된다. 부모가 한 몸이고 부모와 자녀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를 위아래로 구분하지 않고, 먼저와 나중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 한 몸의 원형은 사랑이다. 순기능의 사랑 속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니 아내가 순종하고, 아버지가 무조건적으로 아들을 사랑하니 온전한 인격이 되고 효자가 된다. 그 효자의 의미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 참 자기가 기능하는 온전한 인격을 갖추게 된 아들이 부모에게 받은 바 된 사랑을 부모에게 다시 표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이 아들 안에 충만하게 채워진 그 상태를 아들 안에 아버지가 있다는 말로 표현된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밀착이나 흡수, 굴종의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아들이 온전한 인격이 되어 자라면 건강한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자녀를 동일하게 사랑하고 건강한 인격을 물려 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대(代)를 이어 순기능이 전달되면서 그 구성원들은 모두 부모로부터 사랑 받고 자신의 자녀를 사랑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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