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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1장 2절

최천식 목사
약속의학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2024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교회와 공동체에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 진정한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가장 어두웠던 시대가 있었다. 1907년이었다. 국권은 일본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고 황제는 폐위당했다. 나라를 살려보려던 애국지사들은 몸부림을 쳤고, 심지어 원통한 마음으로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라의 중요한 사람들을 암살하는 음흉한 계략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모든 국민은 허탈과 절망에 빠졌다. 세계가 한국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오셨다. 성령님이 임재하셨다. 민족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시기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쓰러져 가던 한국을 강타한 이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고,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한국 교회사상 가장 중요한 부흥운동이다. 초기에는 선교사 하디(R. A. Hardie)에 의해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한국인 길선주 장로가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20세기 초 불안한 국제정세 가운데 일어났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는 무너졌고, 러시아는 남하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해서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독교를 찾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비록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에서 교회로 오고 있다고 보았고, 이에 이들을 진정한 신자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당시 영미 기독교에서는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부흥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1907년 대부흥운동은 이러한 국제적, 국내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여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원산의 조그만 성경공부 모임에서 시작됐다. 이 모임의 강사는 하디 선교사였는데, 그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가운데 하디는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각성이 아니라 자신의 각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국인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자백했다. 그는 자신이 백인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한국사람들을 낮게 생각하며 대했던 것을 눈물로 고백하며 회개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돼 한국 신자들도 자신의 잘못을 자백했다.


동년 10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프란손(F. Franson)이 원산을 방문해 집회를 열었고, 하디에게 대중적인 부흥회를 인도하는 법을 알려 줬다. 그 후 하디는 1903년 말부터 1904년 말까지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하디가 시작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1905년 9월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연합기관인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단체들이 총망라된 이 모임은 하디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했다.


을사늑약으로 민심이 흉흉할 당시 선교사들은 신앙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실질적인 신앙으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06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해 연합부흥회를 개최했다. 


1906년 9월 부흥사인 존스톤(H. A. Johnston)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성령운동을 설명하면서 이 같은 운동이 한국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이런 존스톤의 언급에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감흥을 받았고,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연합사경회에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는 길선주의 회개로 촉발됐으며, 신자들의 참회와 자백으로 이어졌다. 이후 길선주 장로는 전국적으로 순회하는 부흥사가 됐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요 특징은 첫째,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 가운데 일어났으며, 둘째, 성령의 임재와 함께 철저한 회개가 뒤따랐고, 셋째, 처음에는 선교사가 주도했으나, 나중에는 한국인이 주도했으며, 넷째, 이 부흥회의 결과로 한국교회에 뜻깊은 도덕적 갱신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에 기독교 신앙이 뿌리 내리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거 정치, 사회적인 이유에서 교회를 찾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영적인 체험과 함께 새로운 신앙의 단계에 올라서게 된 계기가 됐다.


백낙준 박사는 그 시대에 일어난 부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것은 장차 한국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회시간마다 목이 터져라 심장이 터져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를 불렀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죄를 고백했고 관계가 깨진 사람을 찾아가 먼저 용서를 구했다. 회개와 성령의 임재, 대부흥과 불신자를 구원하려는 열정이 예배시간, 기도시간, 찬송시간 그리고 성경공부 시간마다 폭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그날의 대부흥의 불길은 불이 번지듯 교회에서 교회로, 도시에서 도시로, 학교에서 학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선교사들과 길선주 장로, 신학생들과 제직들이 가는 곳곳마다 성령의 불이 옮겨 붙고 있었다. 한국교회에 초대교회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평양에서 시작된 불이 서울로 대구로 광주로 의주로 공주로, 선천, 해주, 영변과 재령으로 개성, 강화, 재물포로 원산, 춘천, 북청으로 뿐만 아니라 이 불은 만주와 중국으로까지 번져갔다.


이제 이 부흥의 불길이 2024년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 부흥의 불길은 하나님의 혜택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오늘 하루의 삶이 부흥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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