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회에 걸쳐 자기(SELF)에 대해 연재했는데, 요약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자기(옛사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주님이 부활할 때 함께 살아난 자기(새사람)가 참자기다. 심리적인 내면의 상처로 인한 거짓자기(그림자, 가면)는 구원받고 나서도 여전히 존재하기에 치유의 과정을 거쳐 참자기(내면의 상처를 치유 받은 자기)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옛사람과 구별돼야 하고 새사람은 상처를 치유하면서 찾게 되는 참자기와 구별돼야 한다. 이처럼 옛사람과 그림자, 그리고 새사람과 참자기 등 자기의 4가지 의미가 서로 뒤섞일 때 성경말씀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적용하기도 어렵다. 결국은 신앙생활도 힘들어지고, 잘못된 길을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기에 대한 이해를 확고히 해 새사람으로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은 옛사람이 살아 있는 새사람인 것처럼 속이기도 해(명쾌하게 자기를 주님께 드리지 못하게 함) 그림자와 옛사람이 헛갈린다. 어떤 책에서는 옛사람을 그림자를 같은 쓴뿌리로 혼용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림자는 쓴뿌리로 이해해도 좋지만 옛사람은 믿는 순간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존재다. 더구나 새사람과 참자기의 의미가 뒤엉켜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삶에도 고통을 준다. 새사람은 미해결된 그림자(심리적 거짓자기, 상처, 쓴뿌리)를 안고 있다. 그러나 믿는 순간 새사람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분을 분명히 하자. 신앙을 고백할 때 영적 거짓자기(옛사람)는 이미 죽은 존재이고, 심리적 거짓자기(그림자)는 쓴뿌리를 가진 자기로서 구원을 받은 후에도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자기다. 이 쓴뿌리는 직간접적으로 죄와도 연관되어 있다. 물론 죽은 옛사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속일 때도 죄와 연관된다. 이렇게 죄와 결합된 육체의 소욕들(옛사람, 그림자 등)이 나를 괴롭힐 때, 주저앉으면 안 된다. 날마다 단호히 물리치고 옛사람은 죽었기에 새사람으로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성화의 과정). 반면에 그림자에 대한 부분은 직면하고, 인정해야 한다(치유의 과정).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힌 것은 옛사람의 죽음이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살아났다. 그렇다면 한 번의 회심(옛사람의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영원히, 단번에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인데 아래의 말씀은 왜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I face death every dayes, just as surely as I boast about you in Christ Jesus our Lord.”(NIV)
“I protest by your rejoicing which I have in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KJV)
고린도전서 15장 전체 문맥으로 보면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에 대하여 바울은 반대한다. 그러기에 필자는 전체 문맥상 NIV의 “just as surely as”보다는 KJV의 “protest”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본다. 고린도는 당시 큰 무역항으로서 현재보다도 더 많은 인구가 모여들었다. 또한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내에도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세상의 안락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릇된 신앙을 가졌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며,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에 세상의 안락에 머무르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하여 세상에서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신앙고백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인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의미를 현재의 교회 공동체에게 던진다면 ‘복음이 분명하면’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아직도 기왕에 다홍치마라고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게, 돈 많이 벌고, 존경받으며 적당히 신앙생활 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면 오늘도 바울은 이들을 반대한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을 내려놓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을 강권한다.
이것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 표현했다. 풀어 설명하면 나(거짓자기, 옛사람)는 죽고 내(영적 참자기, 새사람)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매일의 삶을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데(롬 7:25), 그런데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됐기 때문이다(롬 8:2). 그러나 육신의 소욕이 내게 있다(심리적 거짓자기, 죽은 옛사람이 새사람인 양 살아 있는 것처럼 속일 때)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롬 8:13). 이미 옛사람은 죽은 존재지만 마치 살아 있는 새사람과 결합해 속인다. 나아가 그림자인 심리적 거짓자기와 결합되어 육체의 소욕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진짜 새사람으로서의 성화 된 삶(성령의 충만)을 어렵고 한다. 그러기에 혼재되어 있는 이 자기의 4가지 의미를 명확히 해 육체의 소욕이 있을 때마다 영으로써 육체의 행실을 죽임으로(옛사람은 죽은 존재라고 선포하며, 그림자는 직면하고 치유하며) 새사람이 산다. 그렇게 날마다 죽어(옛사람이) 날마다 살아(새사람이) 성화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롬 7:25). 이 고백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이며,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오늘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지 않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마 16:24). 죽은 옛사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나를 속일 때 자기십자가는 무겁고, 살아 있는 새사람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자기 십자가는 가벼워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사람이 된 내가 자기 십자가를 지면, 나를 업고 계신 주님이 보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처럼, 나에게도 말씀이 인쳐 말씀대로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 된 나에게 주님의 길이 나의 길이 된다(요 14:6).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다(마 11: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