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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카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10
김진혁 목사
뿌리교회

저에게는 특별한 조카가 한 명 있습니다. ‘아영이’인데요. 지난 2014년 2월 16일 이집트 무장단체 알 마크디스의 자살폭탄테러로 숨진, 동생 김진규 목사의 딸입니다. 아영이가 4살이 되자 벌어진 일이니 크고 나면 자신의 아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샤르맬 셰이크 국제병원 냉동 창고에서 마주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대방동 보라매병원 장례식장으로 왔습니다. 동생 소식에 오열하고 정신 못 차리는 저와는 달리 형님은 매우 의연했습니다. 어쩜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을까 할 정도였는데, 저는 냉동 창고에서 막내 동생의 시신을 마주하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시신을 어루만지며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정신을 못 차리니 동생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혹 틀어질지 모르는 일처리를 위해 냉정함을 유지했었던 것입니다.


인천국제공항 카고 터미널에 대기해 있던 의전차량에 동생의 관을 싣고, 약 한 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했는데, 우리 삼형제가 이렇게 한 차량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왠지 1분도 걸리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미리 나와 있던 가족들과 많은 지인들이 눈물로 동생을 맞았습니다. 제수씨를 포함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생이 떠나 있던 일주일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카 아영이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동생을 영안실에 안치하고 영정사진을 조문실에 위치하고 났는데도 아영이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준비돼 있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상주석에 자리하고 있으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우리 아이들과 아영이가 떠들며 노는 소리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장례식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그 모습을 보는 제수씨나 우리 부모님의 표정이 많이 어둡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부모님은 한참을 우셨습니다. 특히 그렇게 강인하셨던 아버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오열하셨습니다. 제가 잠시 모시고 있던 때라 그나마 좀 다행이었으나, 두 분만 계셨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을 정도였습니다. 동생을 화장장에서 화장할 때, 몸에서 나온 날카로운 쇳조각이나 구슬같은 폭탄 파편들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대로 쇼핑백에 담아 간직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생과 관련된 작은 부분이라도 연상이 되면 눈시울이 금방 붉어지시곤 합니다.


한 번은 형님 가족이 부모님께 인사차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아버지는 “막둥이가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하시며 또 눈물을 흘리시는데, 몇 번을 거듭해 숨을 가다듬으시고는 저희들에게 할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들한테 미안하지만, 내가 아영이를 편애 좀 해도 되겠냐? 그것이 눈에 그렇게 밟힌다. 어찌 괜찮겠냐?”


같이 놀다 넘어져도 제일 먼저 아영이에게 달려가시고, 자식들이 모여 헤어질 때도 제일 마지막으로 아영이를 배웅하십니다. 홀로 남겨진 제수씨가 가장 힘들 법도 한데, 동생이 간 이후로 다행스럽게도 더욱 우리와의 관계가 돈독해짐은 물론, 아영이까지도 아빠를 찾지 않고 사촌 언니, 오빠들이랑 잘 지내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더욱 돈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편애가 보람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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