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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13
김진혁 목사
뿌리교회

7살 즈음입니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한참 동안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그 때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아버지였기 때문에, ‘왜 안들어오시지? 아빠가 왜 안 보이지?’하는 생각보다, 자주 혼나지 않아도 되니, 집안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삼형제를 제법 엄하게 키우셨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가지는 칭찬을 하면 긴장이 풀려 버릇이 나빠진다는 것이었고, 어른들에 대한 예의가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사는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을 잘 본다거나 상을 받아온다고 한 번을 안아 주신다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적이 없었으며, 등교할 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지 않았다고 학교를 보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전 내내 ‘안녕하세요,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연습하고 나서야 제대로 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다는 것은 삼형제에게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학교에 가 있는 형을 제외하고 동생과 저를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어머니와 외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뭐 사먹으러 가는지, 어디 놀러 가는지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으나 한참을 들떠있는 동생과 저의 손을 잡고 향한 곳은 제법 큰 병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병실 침상에는 아버지가 누워계셨는데, 아버지는 저희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시면서도 편치않은 모습이었습니다.


“힘들게 뭐 하러 데리고 왔어.”


그 때만 해도 한참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가 왜 병원에 계셨던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병원에 계신 이유를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이해한다고 해서 괜히 아이들이 놀랄 수도 있겠다 싶어 굳이 밝히지 않으셨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원래의 모습을 하지 않고 몸이 왜 얼룩이 져 있는지, 왜 야위어 있는지,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많이 어색해했던 기억은 있습니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집에 한참을 들어오지 않으셨고, 언제인지 모르게 집에서 다시 화목해 질때쯤, 저희는 이 때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손님이 참 많이 오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분이 계셨는데, 한 팔이 없는 무서운 인상의 아저씨였습니다. 우리 집에 제일 오래 머무시는 분 중 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웃기도 하시고, 분위기가 갑자기 엄숙해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 분이 아버지와 해병대 동기이자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마, 훨씬 이전부터 아버지와 왕래를 하셨을 터인데, 저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저희 삼형제와도 많이 친해진 목사님은 가끔씩 그 집 아이들도 데려와 놀게 해 주셨는데, 저보다는 한 살, 두 살, 네 살이 어린 동생들이었습니다. 제법 성격도 좋은 친구들이라 저희 형제하고도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얼굴 붉히지 않고 잘 어울려 지내게 됐는데 저희 부모님께서 영등포로 사역지를 옮기신 뒤로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7~8년 정도 흐른 뒤에 우리 가족이 다시 사당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고 그제서야 목사님을 다시 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아버지가 왜 오랜 병원 생활을 하셔야 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사실 전에도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으나 너무 어려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관리집사로 속해 있는 교회 일 외에도 다른 많은 교회들의 일을 봐주시곤 하셨는데, 한 번은 아버지와 그 목사님 그리고 모 집사님까지 세 분이 함께 어느 개척교회 십자가를 다는 작업을 하셨답니다.


종탑에 십자가를 매다는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닌데 전문가 없이 위태롭게 작업을 진행했는지 그만 길게 드리워진 전선을 잘못 건드려 삼만 오천 볼트에 모두 감전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사고로 한 집사님은 돌아가시고, 그 목사님은 온 몸이 익어 돌아가실 줄 알았으나 살이 재생되지 않은 한쪽 팔을 절단하고서야 살 수 있었고, 저희 아버지만 온몸에 새살이 돋아 제일 멀쩡하게 병원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이 때를 회상하시며 “데려가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살려주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십니다. 그 때 운명을 달리하셨어도 마땅한 이치라는 고백이라는 것을 사역자가 되서야 깨달았으나, 지금도 저희 곁에 건강히 살아계신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여담이지만, 그 목사님의 자녀들과는 한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친했던 바로 한 살 밑의 친구와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에서 다시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 휴스턴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 여동생은 미국에 있다가 한국으로 건너와 찬양사역자로, 막내는 한국에서 유명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해병대 동기로 만나 하나님의 귀한 일을 함께 감당한 아버지들과 사역자들이 되어 동일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그 자녀들까지 얼마나 귀한 인연인지 모릅니다.


고통스런 경험이었으나, 공유할 수 있는 아픔과 삶의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큰 복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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