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썼던 ‘존 스타인벡’의 세계적인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단점인 ‘부익부 빈익빈’의 아픔을 잘 그린 수작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일자리는 적고 일할 사람은 넘쳤던 그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게 되고 폭발직전의 화산과 같은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하층계급으로부터 차곡차곡 쌓여져 가는 모습을 소설로 잘 표현했다.
중학교 때 이 작품을 접하면서 ‘왜 맛있는 포도가 분노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포도를 먹는 사람들은 행복하겠지만 그 행복한 사람들의 입 안에서 치아에 씹히고 분쇄되는 포도들은 착취당하는 자들의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고난의 붉은 피와 같은 붉은 즙을 남기며 산산이 부서진다는 상상에서 그 답을 찾았다.
스타인벡 자신도 “사람들의 눈에는 좌절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분노에 충만한 그 포도송이들은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교단 내에서나 교회 안에서도 가끔 분쟁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사단마귀가 주는 이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풍요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포도가 분노의 포도로 변질되고 만다. 분노는 주님의 온유함으로 풀어야 한다.
잠언15:1에서도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하는 교훈으로 우리들을 권면하고 있다.
기드온과 그의 300명의 용사들이 횃불과 나팔과 빈 항아리를 활용하여 135,000명에 달하는 미디안 군대로 하여금 아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사기를 꺾으며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을 때, 뒤늦게 참전한 에브라임지파가 ‘왜 전쟁초기부터 우리들을 부르지 않았느냐’ 하는 구실로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어온 적이 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내가 나팔을 불며 군대를 소집할 때는 모른 척하다가, 이제 큰 승리를 거둘 것 같으니까 공을 챙기려고 떼를 쓰는구나’ 하는 말로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드온은 에브라임지파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았다. 유명한 지혜의 노래,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는 포도송으로 저들의 분노를 잠재웠다.
기드온 자신을 비롯한 므낫세지파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 한들 에브라임지파가 세운 공보다 낫겠느냐 하는 덕담으로 분쟁의 예봉을 피했다. ‘분노의 포도’가 될 만한 상황을 ‘화합의 포도’로 바꾸었던 것이다.
노자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제자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저희에게 남길 말씀이 없습니까?”라고 묻자, “내 입을 보라”고 하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내 이가 있느냐?” “하나도 없습니다”, “혀는 있느냐?” “혀는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것을 전하거라” 하고는 죽었다. 노자가 남긴 교훈은 이빨과 같이 강한 것은 꺾이기 마련이지만 혀와 같이 부드러운 것은 마지막까지 남는다는 말이다.
에브라임지파가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어온 시점은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가 작전상 후퇴를 벌이고 있던 때였다. 이들을 잡지 못하면 유사한 전쟁이 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그 어떤 일보다도 기드온에게 시급했던 일은 미디안의 왕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 만약 같은 편끼리 싸움을 벌이는 동안 미디안의 왕들이 멀리 도망이라도 하게 된다면 전쟁은 장기화할 수도 있는 중요한 시기였던 것이다.
기드온은 진짜로 싸워야 할 대상과 싸움의 우선순위를 잘 아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기드온은 피해야 할 싸움은 피하고, 진정으로 싸워야 할 싸움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더 중요한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사건을 통하여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해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받는다. 기드온에게 싸워야 할 진정한 대적은 미디안의 군대였지 형제 에브라임지파가 아니었다.
우리들이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은 사단마귀와 악한 영들이지 믿음의 형제들이 아니다. 분쟁과 이권다툼이 사라지는 순수하고 성실한 침례교단을 꿈꿔본다.
노주하 목사 / 대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