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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4


펜윅이 공교육을 금지한 결정적 계기가 1924년 10월 11일 발생했는데, 그것은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강경공립보통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였다. 이는 강경신사(神社) 추계대제(秋季大祭) 때 강경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기독교인(천주교 개신교) 학생들이 참배를 거부하거나 불참했는데, 이로 인해 학교 측은 이들을 처벌(퇴학 처분)했다.


4. 일제의 공교육 거부(1926년)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가 심혈을 기울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한국의 교육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한국을 황국신민화해 자신들의 식민지를 공고히 하려는 수작이었다. 이를 위해 1911년 8월 23일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칙령 제229호)은 한국의 학제를 천황의 칙령 아래 위계적인 법체계로 확립했고, 같은 해 10월 20에 공포된 사립학교 규칙(부령 제114호)은 ‘조선교육령’과 동일 선상에서 한국인의 식민지 교육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26년 제21차 대화회(총회)가 예천구역 점촌교회에서 열렸는데, 이때 전격적으로 발표된 것이 펜윅의 ‘공교육(학교 교육) 금지령’이다. 이는 펜윅에 의해 주장됐고, ‘달편지’를 통해 전국교회에 전달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경험했던 김용해 목사는 “1916년 편공부께서는 아는 바 열매(善惡果)는 교만케 하는 것이요(창 3:22), 의심은 죽게(고후 3:6)하는 것으로 주님 오실 때가 이미 가까이 왔으니 세상 사람들이 배우는 학교에 성도의 자녀를 보내어 공부하는 것이 신앙생활 심령에 불가하다고 전제하고 임원들 자녀부터 솔선해서 학교에 보내지 말고 성경을 많이 보는 진실한 사자로 양성하라고 지시하면서 지식 많은 사람 중에 고맙게 믿는 사람이 대단히 귀하다는 것이고 지식보다 구원이 귀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온 교회들은 자녀교육에 등한시하고 또는 단념하였던 바도 있었다(김용해, ‘大韓基督敎浸禮會史’ 44-45).


펜윅의 ‘공교육 금지령’은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표적으로 “(펜윅이) 본래 학교 교육을 받은 바 없으며 근본주의 신앙에 기초한 섭리주의 신앙의 소유자였던 펜윅은 인본주의에 기초한 서구의 세속교육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지녀 왔었다”라는 것이다(허긴, ‘한국침례교회사’, 255). 그런데 만일 이와 같은 주장이 정당하다면, 1903년 펜윅이 공주 성경학원을 설립하면서 이곳에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과는 별도로 측량부를 설치해 기술교육을 병행한 것, 그가 원산에 공업학교를 세워 교인들에게 기술교육을 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 더불어 1916년까지 교단 산하에 여러 남녀 학당이 세워졌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펜윅의 ‘공교육 금지령’에 대한 이유를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펜윅은 1926년 ‘달편지’에서 “우리 놉흔 사람 곧 대학교 졸업쟝 밪은 사람이 리치 설명치 안이하면 다른 사람 알아듯지 못하겠다오. 아난 바는 교만케 하고(창 3:22), 의심은 죽게 하는 것(고후 3:6)이니”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학교 교육 혹은 일반적인 지식을 무시·멸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당시 유행하던 사상인 진화론을 포함해 기독교에 장애가 되는 해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일제의 공교육을 경계한 것이다. 이 같은 교육은 반기독교적이요, 신앙에 해로울뿐더러 복음 전도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봤다.


한편, 장석천 목사가 1930년 7월 25일 ‘중외일보’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은 펜윅의 ‘공교육 금지령’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귀 교회는 적으나 비현대적입니다. 학교 교육은 왜 못하게 합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장석천 목사는 “학교에서 공부만 하고 나면 쓸데없는 허영심만 가득하여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반대로 행동을 취함으로, 일체 위험한 과학사상을 배척한다 하며, 유월경 모보에 소개되었던 자기 아들을 공부 못하게 한 전말을 역력히 되풀이한다.”라고 답했다(호서기자동맹 서부지부, “世人의 疑惑을 밧는 동아기독교의 정체,”).
펜윅이 공교육을 금지한 또 다른 이유는 일제에 대한 저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고, 강제적 통치를 혐오했다. 한 교인이 원산에서 검정 옷을 입었는데 펜윅 선교사가 그를 보고 “그대는 일본 사람 같소”라고 꾸짖으면서 흰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일제에 대한 불만은 일제의 공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일제의 공교육이 한국의 민족적 측면에서나 기독교적 측면에서나 모두 해롭다고 여겼다.


펜윅이 공교육을 금지한 결정적 계기가 1924년 10월 11일 발생했는데, 그것은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강경공립보통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였다. 이는 강경신사(神社) 추계대제(秋季大祭) 때 강경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기독교인(천주교 개신교) 학생들이 참배를 거부하거나 불참했는데, 이로 인해 학교 측은 이들을 처벌(퇴학 처분)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계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초의 공식적 사건으로 그 파장은 매우 컸다. 1925년 조선 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 년 후퇴시켰고, 기독교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즉각적으로 강경교회를 통해 원산총부에 있는 펜윅에게 알려졌다. 그는 일제가 학교를 통해 신사참배라는 반기독교적인 우상숭배 행위를 강요하려는 것에 대해 매우 분노했고, 일제의 공교육이 우상숭배를 부추겨 한국교회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보았다. 결국, 이와 같은 인식으로 인해 펜윅은 일제에 의한 공교육을 금지했다.


펜윅의 ‘공교육 금지령’은 비상식적 처사 혹은 시대를 망각한 몰지각한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일제가 공교육을 통해 반기독교적, 반민족적 행위를 강요한 것에 대한 정당한 항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에 김갑수 목사는 “펜윅 선교사가 일본인들이 세운 학교에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글과 말을 쓰도록 강요하는 일제의 음모를 파악하고 1923년도 각 교회로 공문을 보내 일본 학교에 보내지 못하게 했다.”(김갑수, ‘한국침례교인물사’, 25),


이정수 목사도 “펜윅이 학교교육을 폐지한 것에 대해 여론과 비난이 분분했지만, 그의 이면 정신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본의 혼을 심는 식민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데 발상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진화론에 대해 교육을 하여 성서의 사상에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이정수, ‘韓國浸禮敎會史’, 122), 이명희 박사 역시 “신자의 자녀들을 우상숭배로부터 지키고 또 일본식 교육을 싫어했던 데서 비롯된 지극히 한국인을 존중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대책 없이 무조건 학교 교육을 배척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최봉기·펜윅신학연구소 편, ‘말콤 C. 펜윅: 한국기독교 토착화의 거보’, 372)라고 했다.


펜윅의 ‘공교육 금지령’은 당시 침례교인들과 교회를 반기독교적 사상으로부터 보호하고, 반민족적인 일제의 공교육에 맞선 그의 숭고한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적 측면에서 당시 교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이로 인해 교단의 인재 양성의 길이 끊겨 교단의 발전에 장애가 됐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윅의 공교육 금지는 결코 폄하(貶下)되어서는 안 되며, 이를 통해 그가 일제에 항거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재평가돼야 한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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