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동아기독교회의 지속적인 신사참배 거부에 제동을 걸고 탄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1940년 동아기독교회 원산총부에 교규(敎規) 제출을 통보했다. 이에 교단총부는 서둘러 성경을 토대로 15장 36조의 교규를 작성했고, 원산에 있는 진성여자보통학교 교장인 강주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일어로 번역해 1940년 9월 9일 당국에 제출했다. 본 교규는 이종근 감목이 1940년 7월 15일 함경남도 원산부 영정을 주소로 포교관리자 설치를 신청한 서류와 함께 제출했는데, 주된 내용은 1906년에 작성했던 교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가 동아기독교회에서 제출한 교규를 면밀하게 검토하던 중에 소위 ‘우태호(禹泰浩) 사건’이 발발했다. 그는 벨몬트침례교회에서 전도 목사로 안수받은 후 미남침례회 해외선교회 일본국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입국해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1941년 말엽 원산의 동아기독교 교단총부를 찾아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교단 임원들은 우태호와 같은 외부인의 합류를 달갑지 않게 여겨 함께하는 것을 거절했고, 심지어 안대벽은 그가 교단 재산을 노리고 합류를 시도한다고 여겨 일경에게 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기까지 했다. 이에 우태호도 교단에 의혹을 품고 일본 헌병대에 동아기독교회를 불순한 단체로 고발하였다. 그는 동아기독교회의 실태 파악을 위해 원산번역 “신약젼서”와 “복음찬미”를 주의 깊게 살폈고, 이들 책을 성서공회 총무 오문환에게 건넸다. 오문환은 우태호에게 건네받은 두 책이 검토한 후 불온문서로 규정해 총독부 경무국에 고발했다. 특히 “복음찬미”의 “대왕님 예수씨 보혈”이라는 용어와 “주의 재림”에 대한 가사 내용을 트집 잡아 이것은 일본 천황에 대한 모독과 국체명징에 벗어나는 불온적인 사상으로 비판했다. 이에 일제는 동아기독교회 원산총부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이곳에 보관하고 있던 6,500여 권의 “신약젼서”와 “복음찬미” 그리고 교단의 제반 서류와 각종 문서 등을 강제로 몰수했다.
1942년 6월 10일 원산의 헌병대는 교단총부를 재차 불시에 수색하는 한편 교단 대표인 이종근 감목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는데, 이는 천년왕국에 대한 설교와 동방요배 반대 및 신사참배 거부를 들어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 혐의 때문이었다. 이미 동아기독교회는 함경북도의 웅기교회에서 있었던 ‘달편지’ 발각사건으로 인해 5인의 교단 지도자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일제는 검속된 이종근 감목을 다음과 같이 심문했다.
문 : 예수가 재림한다는 데 어떤 지위로 재림하는가?
답 : 성경 말씀대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왕국을 건설하신다.
문 : 천년왕국을 건설하면 일본도 그 통치에 들어가는가?
답 : 그렇다.
문 : 일본의 천황폐하도 불신 시는 멸망하시는가?
답 :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다.
문 : 찬미가 7장에 “대왕님 예수”라 했는데 예수는 천황폐하보다 더 높은 대장인가?(그때는 일본도 망하고 천황폐하도 예수 통치하에 들어가는가?)
답 : 전 세계가 통이 되는 동시에 예수님 아래 있을 수 밖에 없다.
문 : 국체명징(國體明徵)에 위반이면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을 모르는가?
답 : 신앙 양심에 답하는 바이다.
문 : 단체 대표인 감목이 그렇게 답변할 때 간부는 물론이고 전 교단 내 지도자들도 같은 신조를 지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답 : 같은 성경으로, 같은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합치되는 이론일 것이다.
일경이 집요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이종근 감목이 단호하고 침착하게 일관적으로 대답하자 일제는 다음날 전치규 목사와 김영관 목사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이들을 무려 3개월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심문했으나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일제는 1942년 9월에 또 다른 교단 지도자들에게 구인장을 발부했고, 9월 11일까지 총 32인의 교단 지도자들이 체포했다. 그 32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6월 10일 : 이종근 감목(함남 원산)
6월 11일 : 전치규 목사(강원 울진), 김영관 목사(강원 울진)
9월 4일 : 김용해 목사(전북 익산)
9월 5일 : 노재천 목사(경북 상주)
9월 6일 : 박기양 목사(경북 예천), 신성균 목사(경북 점촌), 김주언 감로(경북 점촌), 이덕상 교사(경북 점촌), 이덕여 감로(충남 예산)
9월 7일 : 장석천 목사(충남 임천), 김만근 감로(충남 임천), 이상필 감로(전북 용안)
9월 8일 : 백남조 목사(경북 광천), 박두하 감로(경북 영양), 박병식 감로(경북 조사리), 정효준 감로(경북 영일)
9월 10일 : 문규석 목사(강원 울진), 남규백 감로(강원 울진), 문재무 감로(강원 울진), 전병무 감로(강원 울진), 안영태 감로(강원 구산), 김해용 감로(경북 울도)
9월 11일 : 박성도 목사(함북 경흥), 박성은 감로(함북 경흥), 박성홍 감로(함북 경흥), 방사현 목사(평북 자성), 위춘혁 교사(평북 자성), 한기훈 감로(평북 자성), 김재형 목사(함남 원산), 한병학 감로(함북 나진), 강주수 선생(함남 원산)
모진 고문과 옥고에 시달리던 교단 대표 32인은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됐다. 이들은 푸른 미결수복을 입은 채로 교도소에서 10리나 떨어진 함흥재판소로 끌려다니며 일본 관헌이 퍼붓는 갖은 욕설과 구박을 감내해야 했다. 15일간의 재판 결과 32명 중에 이종근 감목을 비롯한 노재천·전치규·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 등 9명의 목사는 검사에 의해 공소가 제기되어 피고들의 공판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목사 4명, 감로 16명, 교사 2명, 평신도 1명)은 범죄 혐의는 인정되나 피의자의 여러 정황 등을 참작해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계속>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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