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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인(3)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13

김영관 목사(金榮官, 1896-1986)
김영관은 189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4남(영국, 영진, 영익, 영관) 1녀(명선) 중 4째로 출생하였다. 본래 그의 가정은 진천 김씨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으로,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첫째 영국과 둘째 영진이 1907년 간도에서 활동하던 김재형과 김경춘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두 형제는 부친의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견뎠고, 마침내 가족 모두를 복음화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뤘다. 형들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은 김영관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고, 형들의 신앙을 본받아 날로 믿음이 성장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목숨 걸고 기독교 신앙을 믿고, 전해야 했던 시기였기에 온갖 고난과 환란 속에서 4형제는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의 간도 선교가 시작된 이래 1912년에 이르러 김영관은 형인 김영진과 함께 안규찰 종찰의 지도로 중국의 임강현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감당했고, 이듬해인 1913년에는 윤종두, 윤종진, 이만기, 홍순필 등과 함께 임강현에서 압록강 너머 대안 지역인 평안북도의 자성, 후창으로 넘어가 사역했다. 이때 중국어에 능통한 방사현과 많은 새신자를 얻음으로 이 지역의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924년 강원도 울진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에서 김영관은 신성균, 박기양, 김용제와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고, 중국의 왕청구역에 파송되어 순회활동을 했다. 그가 한참 활동하고 있던 시기인 1928년 9월 14일, 두 형님인 김영국 감로(1919년 감로 안수)와 김영진 목사(1919년 목사 안수)가 만주 종성동교회에서 공산당에 의해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필자가 2017년 9월 중국의 현지에서 김영익 감로(김영관 목사 셋째 형)의 장손과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후손들은 김영국 감로와 김영진 목사의 순교가 일제의 주구 무장 자위단의 소행으로 보고 있음).


김영관 목사는 왕청구역 순회전도로 출타 중이었기에 참변을 면할 수 있었으나, 30여 명의 공산당 유격대원들이 종성동교회에 난입해 교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교회 책임자를 추궁했는데, 이때 두 분의 형제는 오히려 간곡한 말로 전도했다. 이에 공산 폭도들은 두 분에게 결박한 후 심한 매질로 악형을 가했다. 이로 인해 두 분은 숨을 거두게 되는데 죽으면서까지 “감사하오”를 되뇌었다고 한다. 비록 김영관 목사는 화를 면했으나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순회전도를 통해 마음을 달랬고, 사경회 때에는 간증으로 많은 감명을 끼쳤다.


1934년 제4대 감목(총회장)에 피선된 김영관 목사는 날로 포악해지는 일제의 만행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특히 신사참배 강요는 가장 큰 과제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매우 단호했다. 그리하여 1935년 10월 5일 자 ‘달편지’를 통해 전국교회에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의 부당성과 당국의 강요에 불복할 것을 당부하는 광고를 했다.


“어떤 구역에서는 관청 당국에서 황제에게 요배를 하라고 시켰사오나, 그것에 대하여 결코 응할 수 없는 것은 가령 황제님 앞에서 절한다는 것은 옳지만 멀리서 보이지 않는 데서 절하는 것은 헛된 절이며, 곧 절반은 우상의 의미를 가졌으니 이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 믿는 사람은 못할 일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고 황제께 불경한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믿는 사람이 복음을 어기고 황제께 공경한다면 진정한 복음이라고 할 수 없고 따라서 복음을 어기고 자기를 공경하라고 명하실 황제님이라고 저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불경죄라고 책임을 지운다면 그 은혜 베푸시는 대로 핑계 없이 감당하기를 원하며….”


김영관 감목(총회장)은 일제의 황궁요배 강요는 우상숭배로써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고, 믿는 사람이 복음을 어기는 것이 되므로 결코 응해서는 안 되며, 만일 일제가 이를 불경죄로 다스린다면 기꺼이 순교할 것을 당부했다.


이런 와중에 1938년 웅기교회 ‘달편지’ 발각사건이 발발했다.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는데, 이는 동아기독교 탄압의 빌미가 되어 김영관 감목(총회장) 외에 백남조 총부서기·이종덕 안사·전치규 안사·노재천 목사 등 5인이 원산경찰서로 긴급 소환됐다. 일제의 강압적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답변으로 인해 일제는 가둔지 3개월 만에 이들을 검찰에 송치해 5개월간 원산교도소에 감금했다. 이후 더 이상의 죄를 발견하지 못한 일제는 김영관 감목(총회장)은 백남조 총부서기와 함께 3년 집행유예를, 다른 3인은 기소유예로 석방했다.


김영관 감목(총회장)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간악한 회유와 협박 그리고 혹독한 탄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에 응한 일부 동아기독대 교인들이 생겨나자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39년 3월 원산에서 임원회를 긴급하게 소집했다. 감목(총회장)의 당부에 일부 교회에서 시국을 외면한 조치라며 반발했고, 이로 인해 불만이 고조됨에 따라 임원들은 문제해결을 위해 논의하였다. 신사참배 거부에는 변함이 없으나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과 교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모색에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김영관 목사는 감목(총회장) 직을 사임했다. 이에 임원회는 원로교우회를 확대해 교단의 현안 처리에 힘썼으나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9년 제34차 대화회(총회)에서 ‘숨님(성령)의 권능이 행하시는 대로 다룬다’라는 신앙적 결단에 따라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대한 일제의 강요에 굴하지 않고 교단의 신앙적 입장을 그대로 지켜나가기로 결의함에 따라 일단락됐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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