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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從)인가? 주인(主人)인가?

 

1969년 필자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해()인가 학생복이 새로이 출시가 되었는데 그것이 스마트 학생복이었다. 내 눈에 얼마나 기름이 자르르 흐르던지 너무 매료가 되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바지는 광목에 검은 물을 들인 바지인데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당시 광목 바지 값은 600원 정도이며, 그 스마트 학생복 바지는 1300원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높은 담이었다.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이 겨울에 인기가 있는 스케이트였다. 그 당시 실내 스케이트장은 동대문에 하나가 있고 나머지는 동네에 넓은 공터나 좀 외곽에 논이나 밭을 정리하여 만든 스케이트장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놀 것이 없는 상황에 스케이트를 탄다는 것이 여간 흥분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케이트가 없다는 것이다. 구입 금액은 대략 2,500원정도인데 그리 쉬운 금액은 아니었다. 대여해서 탈 수가 있었는데 대여하는 것도 해결이 안 되어 내 것으로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일기장에 스마트 학생복 바지와 스케이트 구입 금액을 적어 놓고 기다리는 것이 소원이고 꿈이었다. 아마 생각해보면 그 당시부터 나에게 소유욕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어느 때인가 옆집 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은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 그에게는 1원짜리 그림딱지가 3개나 가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가지고 싶은 마음에 그 중 하나를 훔쳐서 나의 집 부엌에 숨겨 놓았다.

 

그러나 오래가지고 놀지도 못하고 그날 저녁에 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부엌에서 연탄 부지깽이로 얼마나 맞았는지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주지 못하여 아들을 때리는 어머니도 사주지 못한 서러움에 많이 우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 어머니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때 그 사건으로 그 후부터는 남의 것을 넘보지 않게 되었다. 어떻든 간에 학생 때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성년이 되었다. 직장을 가진 후 여유만 있으면 양복이나, 구두나, 와이셔츠나 양말을 사드렸다.

 

장롱에 쌓아두고 그것을 보며 만족을 누렸다. 언젠가 치유를 하는 과정에서 나의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를 내어 이것이 누구의 것이냐는 프로그램을 했는데 나를 비롯해 몇 사람은 많은 시간을 나의 것으로 고집하다가 기어코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어느 사람은 끝까지 자기의 것으로 고집하다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장소를 떠나가고 말았다.

 

어떠하든 어머니의 그 매로 그 다음부터는 남의 것을 한 번도 넘보지 않는 계기가 되었고, 또 프로그램으로 말미암아 결국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러한 치유가 되지 않았으면 지금도 많은 것을 넘보고 사들이고 집착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주변에 목회자들이 이러한 소유욕에 마음을 빼앗긴 분들이 여럿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목회 현장에서 교회가,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의 소유인양 집착하시는 목사님들을 보게 된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종이라고 한다. 이 지상에 나의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사실 나의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자.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무도 죽을 때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또한 병이 나더라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키도 내 마음대로 커지거나 작게 할 수 없다. 나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주인이 계시는데 내가 주인이 되어서 교회도, 교인도 자기 소유로 생각하곤 가까이 오는 자에게 총부리를 들이댄다면 되겠는가? 이것은 종이 하는 행동이 아니다.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6~27)하셨다.

 

그런데 제자의 길을 가는 구도자가 또한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주님의 제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제자의 길을 가고,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셨을 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주인으로 사는 목사님들은 말씀 앞에 치유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보거나 말하기 위해 주신 것보다 그것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다. 행동으로 옮기라고 주신 것이다. 종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보이는 것을 향하여 날마다 목말라 한다. 이처럼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의 결여를 가져 온다.

 

왜곡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의 눈이 바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결코 세상 것으로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본질적 갈증을 채워줄 이가 없으며, 또한 우리의 상함의 고침이 없는 한 그 어떠한 것으로 채워도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상함과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상에 중독되고 포로 되어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나를 찾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듯이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에서 떠나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주인 노릇하며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떠나지 않고는 치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종이 되지 않는 이상 하늘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리가 내일을 준비한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나의 내면을 거울 앞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15:21절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할 때 아버지는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발에 신을 신기며 관계회복과 권위와 신분 회복을 주셨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처럼 자기 것만을 챙기는 자의 결말을 성경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혹시 주인으로 사는 자들이 있다면 이제부터 종의 위치를 감당하자. 이것이 제자로 사는 길이다.

 

이규호 목사 

처음사랑교회

행복가정치유상담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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