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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의 제2신

제주도에 다녀와서는 해외에 갔다 왔다고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해외는 바다 해()자에 바깥 외()자를 써 바다 밖이라는 뜻으로 다른 나라를 이르는 말이니 농담으로서 어울리는 표현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제주도는 육지 사람들에겐 이국적인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바람과 돌이 많은 것은 그만두고라도 아열대 식물에 선인장까지 자생하는 곳이다 보니 제주도에서 이국의 정취를 맛본다 해도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듯싶다. 거기에 동남아 휴양지의 어느 해안이 아닌가 싶을 만큼 맑고 파란 바다는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이다.

 

필자는 지난 번 칼럼에 한 달 예정으로 제주도에 와 있다고 쓴 바 있다. 지금 3주를 보내고 1주 남짓 남겨 놓은 시점을 지내며 아름다운 환경에 젖어 여유로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육지와는 많이 다른 풍물에 심취하며 좋아하는 사진도 원 없이 찍고 있다. 그런데 심히 당황스런 경험까지 해 버리고 말았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곳인데도 세 번씩이나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제주에서도 물이 맑아 아름답기로 유명한 함덕 서우봉 해변에서 사진을 찍고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을 잃었고, 제주 돌 문화 공원에서는 구경을 한 뒤 출구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리고 그 공원 안에 있는 초가마을의 한 집에서는 이것저것을 살펴보다가 출입문을 못 찾아 안절부절 못했다.

 

이리되면 나이 탓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필자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 적어졌다. 자연 자체를 보고 즐기는 것보다 피사체 찾기에 여념이 없다. 여행을 해도 볼거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로서의 가치를 저울질한다.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푹 빠져서 화각을 잡아 본다.

 

필자는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하면 거기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다. 일단 한 가지에 몰입하면 다른 것은 염두에서 사라지고 만다. 본래는 무엇을 해도 집중할 수 없어 제대로 해낸 것이 없었다. 특히 공부는 더욱 그래서 작심삼일은커녕 단 하루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것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고 나서는 신기할 정도로 달라졌다. 무엇이 됐건 한 번 시작하면 몰두할 뿐 아니라 끝장을 내고야 마는 성격으로 변했다. 아니 자연히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둔하고 능력 없는 필자를 불쌍히 여겨 그리해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필자가 3주 동안에 세 번씩이나 갈 길을 찾지 못하여 낭패를 당한 것도 사진을 찍는 일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길이 피사체를 찾는 데에 몰두한 필자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참으로 위대한 것(?)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정신이 팔려 진짜 소중한 것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믿음과 그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분주한 세상살이에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육신적인 것들에 얽매여 그것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아니 말로는 하나님님을 향한 믿음이 가장 소중하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물질 같은 육신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보통이다.

 

하늘나라로 가는 여로인 이생을 살면서 우리는 목적지를 알리는 깃발을 보지 않고 세상살이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재물 많이 얻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은총이나 자신을 망치는 저주가 될 수도 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는 목적의식을 붙들고 살면 세상살이가 은총이 되나, 목적의식을 상실하거나 외면하는 가운데 얻은 물질이나 지위 같은 것은 저주가 된다. 필자가 피사체를 찾는 데에 정신이 팔려 길을 잃은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선 안 된다.

 

필자는 전술한 제주 돌 문화 공원에 두 번 갔다. 처음 갔을 때는 구름이 많이 끼어 사진을 찍지 못해 다음날 다시 갔다. 처음 갔을 때 마음에 꼭 드는 피사체를 하나 발견했으나 햇살이 없어 찍을 수가 없었다. 숲속 길가에 서 있는 돌하루방이었는데, 얼굴이 검은색과 흰색으로 양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머리에 이끼가 끼어 머리털을 대신하고 있었음으로 이것을 찍으면 작품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날씨가 말렸다.

 

직사하는 빛이 없으면 사물의 입체감은 떨어진다. 그리니 그런 때 찍으면 흐릿하고 밋밋한 사진밖에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갔다. 그날은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그러나 피사체가 있는 제2코스라는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가 본 적이 없는 길이지만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바로 찾아들 수 있었는데, 두 번째는 바로 어제 갔던 길인데도 찾는 데에 애를 먹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작부터 길의 안내표지를 따라 갔기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두 번째는 어제 갔던 길이라서 안내표지를 보지 않고 피사체가 있는 곳을 바로 찾으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도중에서 안내표지를 찾으려 했으나 그게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찾아 그에 따라 가니 그 뒤부터는 순조롭게 나갈 수가 있었다.

 

아둔한 필자는 여기에서도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인생행로의 안내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필자라고 해서 이 같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상식중의 상식을 모르고 있었을 리는 없다. 알고 있었으나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지식 만으로서의 앎이었다. 그러던 것을 작은 경험이 일깨워 준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새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이다. 먹고 크리스천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하라고 주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믿음의 인격을 기르라는 말이다. 크리스천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인가. 맞다. 아멘 아멘 하며 무엇이든 일만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사람들인가. 그것도 맞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

 

문지방이 닳도록 교회에 드나든다고 다 믿음의 사람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아멘을 외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인가. 믿음의 인격을 길러 가는 사람이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도 성경대로만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는 것이다.

 

단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있다. 성경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 성경에 따라 믿음의 인격을 기르려고 줄기차게 노력하는 사람, 이들은 허물투성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니 은혜이다.

 

거듭 말하지만 무엇이든 일만 있으면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나쁜 것은 습관적으로 그리한다는 것이지 은혜라고 말하는 자체는 아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는가.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은혜이다. 좋은 일이 있어도 은혜요, 심지어 나쁜 일이 있어도 은혜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나쁜 일이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되 이길 수 있는 것만 주신다 했다. 그러니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이기면 은혜로 이어진다. 시험이 됐건 난관이 됐건 우리에게 닥치는 것들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기라고 마련해 주신 훈련이요 단련의 과정이다.

 

눈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노랄 정도로 절망적인 일을 당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경우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며 사력을 다해 이기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모든 일은 지나간다. 하나님보다 큰 문제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보다 크게 느끼는 것이다.

 

은혜를 말하다 보니 말이 곁길로 빠지고 말았다. 어쨌든 우리는 자신이 걷는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해 깨닫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훈련이요 연단이며 교육의 과정이다.

 

임 종 석 목사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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