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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침례교 1> 강경침례교회를 세운 사람들 (1)

 

 

1. 에드워드 클레이톤 폴링 선교사의 교회 창립

강경침례교회는 에드워드 클레이톤 폴링(Edward Clayton Pauling; 1864~1960) 선교사 부부가 지병석과 그의 부인 천성녀, 아만다 가덜라인(Amanda Gardeline) 선교사 등과 함께 189629일 주일날 강경읍 북옥동 136번지 지병석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창립됐다.

강경교회는 한국에서 조직된 최초의 침례교회였다.

 

폴링 선교사가 한국으로 오게 된 배경은 188912월 초에 한국에 왔던 캐나다 독립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의 영향 때문이었다.

 

펜윅은 188912월에 한국에 도착해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아야 할 필요와 선교자금을 보충할 목적으로 1893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아도니람 저드슨고든)                 (펜윅 선교사)

펜윅은 미국에 가서 보스턴(Boston)에 소재한 클라렌돈 가 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인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Adoniram J. Gordon)을 찾아갔다. 고든은 찬송가 315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를 작곡한 음악에 재질이 있고, 초교파적으로 유명한 목사였다. 펜윅은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 전에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했었는데, 그 사경회의 주 강사 중 한 사람이었던 고든에게 감명을 받아 그를 찾아간 것이었다.

 

고든은 자신의 교회 내에 188910월에 설립한 보스턴선교사훈련학교(Boston Missionary Training Institute)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현재 유명한 복음주의 학교인 고든 콘웰 신학교로 발전했다.

 

펜윅은 보스턴선교사훈련학교에서 공부한 후, 18944월에 에드워드 폴링을 비롯해 다른 5명과 함께 고든과 아더 피어슨 목사(Arthur T. Pierson)의 주례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피어슨은 한국의 평택대학교 설립자이고, 영국 런던에 있는 찰스 스펄전의 테버네클 교회에서 얼마간 설교사역을 했었다. 펜윅은 고든 목사와 동료 학생들에게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적극 개진하였고, 이에 감동한 고든은 선교사훈련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고든은 1885년에 세워진 엘라 씽 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통해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송했다. 이 선교회는 고든 목사 교회의 새뮤얼 씽(Samuel B. Thing) 안수집사가 일찍 세상을 떠난 외동딸 엘라의 상속재산을 주님의 사역을 위해 바친 것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고든은 폴링 목사와 아만다 가덜라인 양을 엘라 씽 선교회 한국선교사로 파송했다. 폴링과 가덜라인은 18945월에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그들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와서 상황을 살펴본 후, 다시 일본에 가서 수개월 머물렀다. 그 사이 폴링은 약혼자였던 마벨 발렌타인 홀(Marbel Valentine Hall)과 요코하마에서 1895214일 결혼했다.

 

그리고 곧장 아내와 가덜라인을 데리고 한국을 향해 떠났다. 1895년 봄부터 폴링 선교사 일행은 서울에 머물면서 전도했다. 여러 사람들이 침례 받기 원했지만, 폴링은 온전히 회심한 것으로 보이는 한 사람에게만 침례를 베풀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서울과 군산, 강경을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이였다.

 

겨울에 얼었던 금강이 풀려 뱃길이 열리자, 지병석은 폴링 일행을 강경으로 데리고 와서 강경읍 북정(북옥동) 136번지 자신의 집에서 189629일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강경교회를 시작했다. 폴링은 이듬해인 1897년에 지병석의 집 바로 옆(북옥리 137번지)자 교회를 신축했으며, 이것은 동대문교회(1892), 소래교회(1895) 다음의 3번째 자 교회였고,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자 교회였다.

 

(폴링선교사 가족들)

에드워드 폴링과 마벨 홀은 7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얻었는데, 그 중 처음 4명은 한국에서 출생했다. 첫째 아들 고든 폴링(Gordon H. Pauling)18951221일 출생했지만, 3년을 조금 넘긴 1899111일에 사망했다. 고든 폴링의 묘비는 현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에드워드 폴링은 향년 96세인 1960년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2. 프레더릭 스테드만 선교사

(프레더릭 스테드만 선교사)

프레더릭 스테드만(Frederick W. Steadman; 1871~1948)은 캐나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 주 빌타운(Billtown)에서 18711010일에 태어났다. 그는 25세가 되던 1896년에 두 명의 여자 선교사, 알마 엘머(Alma Ellmer), 새디 에클스(Sadie Ackles)와 함께 엘라 씽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이들은 모두 고든의 보스턴선교사훈련학교 출신들이었다. 스테드만은 1897929,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그네스 테일러 브라이든(Agnes Taylor Bryden) 양과 서울에서 결혼했다.

 

스테드만 일행은 공주와 칠산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폴링은 1899년에 선교를 중단하고 강경교회를 스테드만에게 위임하고 귀국했으며, 스테드만은 19014월까지 강경교회를 담임했다.

 

스테드만은 그 후 미국침례교(북침례교)선교연맹 선교사로 일본에 왔는데, 일본에서 사역하면서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과거의 성도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스테드만은 193312월에 은퇴했고, 1948년에 향년 77세의 나이로 미시간 주 랜싱(Lansing)에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3. 말콤 펜윅 선교사

(펜윅과 신명균 목사)

스테드만은 19014월에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강경교회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의 엘라 씽 선교회의 사역과 재산을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 선교사에게 이양했다. 그 당시 원산에 있었던 펜윅은 5개월이 지난 9월에 신명균을 대동하고 강경으로 왔다.

 

그는 신명균에게 강경교회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 교회들을 맡기고 원산으로 돌아갔으며, 그 후 1년에 한 두 차례 충청도 지역을 방문하여 교회들의 형편을 살폈다. 펜윅은 1935126일 한국에서 만 46년간 사역하고 원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4. 이종덕 목사의 순교

19458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난 후, 강경교회의 윤석훈, 나상순 집사와 성도들은 힘을 내어 홍교리 114번지에 있던 일본인 사찰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동아기독교회 제2대 감목을 역임한 이종덕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셨다. 이종덕 목사는 19469월 강경교회에서 개최된 해방 후 첫 총회인 제36차 대화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됐다.

 

19506.25 동란이 발발하자 공산당의 위협을 피해 강경의 유명 인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으나, 이종덕 목사는 끝까지 남아 순교할 각오로 교회를 지켰다. 그는 공산당들이 강경을 점령했을 때도 인민위원회와 내무서 등을 찾아가 김장배 부목사가 만들어준 명함을 전달하며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다.

 

공산당들은 퇴각하던 날인 1950928일 밤에 이종덕 목사를 체포해 금강연변 갈대밭에서 총살시켰다. 이종덕 목사는 야음을 틈타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었으나, 함께 잡혀간 김요한 집사만 도피시키고 본인은 기꺼이 순교자로 주님을 만났다.

 

김용국 교수/ 침신대 신학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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