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천상의 성소에 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임을 함의한 표현이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물론 본 구절에서 말하는 ‘거룩’은 윤리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거룩함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 제시한 것은 거룩함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요건임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보다’를 언급한 것은 구원론을 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자가 주를 본다’에는 종말론적 의미도 함의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종말이 오면 구원 받은 거룩한 자들은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문헌(구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다’는 통일성과 이견을 함께 보여준다. 유대문헌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려는 특성이 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날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남겨두었다. 신약성경은 유대문헌과 다르게 하나님의 현현이 예수를 통해 나타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현현을 가시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본 자들은 하나님을 본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유대교 사상과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분으로 인식한 반면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와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보다’를 미래에 일어날 종말론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IV. 산상수훈에 내포된 마태공동체의 전환기
정체성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을 보다’의 연구 결과를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의 해석에 대입하기 전에 먼저 산상수훈에 함의된 마태공동체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산상수훈에는 마태공동체의 배경적 정황을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유대교 배경에서 시작된 마태공동체가 기독교 공동체로 정체성을 전환하고 있음이 산상수훈에 묘사된 예수의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마태공동체를 향한 예수의 특별한 가르침이 산상수훈에 내포되었음을 의미한다. 산상수훈의 핵심 내용은 바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다. 마태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을 그들 공동체 상황에 적용한 것이다.
벧즈(H. D. Betz)는 산상수훈에 인용된 다양한 자료 분석을 통해 산상수훈이 마태복음의 다른 부분과 신학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다섯 강화 가운데 각 강화에 나타난 신학적 특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마태복음의 다섯 강화 가운데 어떤 강화는 신학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강화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상수훈에 묘사된 기독론이 다른 강화보다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태복음 5~7장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핵심이지만, 산상수훈에는 여전히 유대교의 기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태의 ‘유대 기독교 공동체’(Christian Judaism Community)의 정황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즉 마태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전에 소유했던 유대교적 신앙 요소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의 다른 강화보다 신학적으로 더욱 발전된 측면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5~7장에 유대교에서 분리가 진행 중인 마태공동체의 전환기적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공동체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격을 함께 공유한 전환기적 공동체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정체성을 바꾸는 상황에서 어떠한 전환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종파(sect) 관점에서 살펴보자.
마태복음 5장 20절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eja;n mh; perisseuvsh/ u`mw’n h` dikaiosuvnh plei’on tw’n grammatevwn kai; Farisaivwn, ouj mh; eijsevlqhte eij” th;n basileivan tw’n oujranw’n)고 말한다. 이 구절은 마태공동체의 정체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하나의 종파(sect)임을 의미한다.
종파를 원래 자신들이 속했던 단체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 형성한 그룹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새로운 종파가 생겼다고 하여 그 종파가 원래 속했던 단체보다 무조건 작다거나, 성격적으로 자신들이 원래 소속했던 단체를 적대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원래 소속된 단체에서 분리되어 나온 종파는 그들의 활동과 믿음에 대한 합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형태의 종파로서 합법성을 가졌지만, 여전히 유대교 요소를 함의한 단체임을 부인할 수 없음을 말한다.
오브만(J. A. Overman)은 마태공동체를 유대교에서 분리된 종파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중인 새로운 종파인 마태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 준다.
산상수훈에는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의 한 종파였음을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첫째, 새롭게 형성된 종파는 원래 그들이 속했던 그룹과 자기들의 그룹을 구분하려고 특별한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마태공동체는 “의”(righteous)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산상수훈에는 “의”가 여섯 번 나온다(5:6, 10, 20, 6:1).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의에 주린 자,” “의를 위해 핍박 받음”이다. 마태공동체는 그들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이나 단체보다 더욱 의로워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새롭게 형성된 전형적인 종파였음을 의미한다. 전통 유대교에서 ‘의’는 주로 사회적 정의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됐다.
, 억압 그리고 애통한 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들에게는 진정한 사회적 정의가 필요했다(시 42:1-3; 107:2, 5, 6). 이러한 행위를 ‘의’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의”를 개인 영혼의 목마름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했다. 하나님의 ‘의’만이 주린 영혼을 채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 것은 산상수훈에 묘사된 ‘의’는 종말론적 성격을 함의한 기독교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의’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의’가 아니라 마태 기독교 공동체가 새롭게 정의한 ‘의’다. 이와 같이 산상수훈에 사용된 ‘의’는 마태공동체가 유대교 배경에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 공동체로 전환중임을 드러낸 것이다.
신인철 교수
침신대 신학과
(성서신학/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