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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척, 누구를 위한 것인가?

며칠 전 타 지역에 계시는 목사님 한 분이 어느 교회의 개척예배에 참석하러 전주에 오셨다가 필자의 집에 들르셨다. 필자와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는 목사님께서는 좀 전에 다녀온 개척교회가 무척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었다. 예배에 설교를 하신 목사님이나 축사를 맡은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해 주셔서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부흥도 할 것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어디 그러냐는 것이었다

 

사실 필자는,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으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개척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다. 신학을 했으니 목회를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하는 어떠한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작용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봤다. 그런데 목회를 하려해도 오라는 교회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된 것이 개척일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신학교 시절 같이 공부했던 학생들이 교회개척에 관심을 보이면 그런 거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도와 드리는 것이 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농담을 가장한 필자의 진심이기도 했다.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회개척의 현실을 보면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좁은 공간은 그렇다 치고,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문을 연 교회가 몇 년이 가도 열 명의 교인도 얻지 못하는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그러니 문을 닫고 자리를 옮겨 또 시작을 해 보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개척을 시작한 목사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과 몇 안 되는 교인들까지 죽을 고생을 하는데도 그 열매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척의 한 단면이다.

 

몇 집 걸러 교회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한 건물에 교회가 두세 개씩 들어 있는 경우까지도 있다. 그런데 그중에는 빈자리가 그렇지 않은 자리보다 더 많은 교회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것이 현실인데 왜 굳이 개척을 해야 하는지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교회의 남아도는 자리를 채우는 데에 있는 힘을 다 쏟아도 모자라는 현실에는 눈을 감고 기어코 개척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난감해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편견 때문일까.

 

필자의 청년시절에는 교역자가 부족하여 시골에서는 한 분의 목사나 전도사가 두 교회, 또는 세 교회를 돌보는 일이 많았다. 그때는 사명감 때문에 싫지만 목회에 나선 교역자가 많았다. 그런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아마 무척이나 기쁘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

 

정말 사명감을 느껴 세속에 물든 교회가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각오와 결단으로 개척을 하겠다면 필자도 대찬성이다. 자신에게 목회의 은사가 있는지부터 살피고난 후에 기도와 면밀한 계획으로 개척하여 모든 역량을 쏟아 붙는다면 교회가 성장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교회는 동네 구멍가게처럼 문을 열었다 잘 안되면 닫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단 개척을 했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로서 부족한 점을 찾아 채우려 기도하며 땀을 흘려야 하고, 자신이나 교회를 위한 전도가 아닌 죽어가는 생명을 위한 전도에 온힘을 기우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도 위하고 교회도 위한 것이 되고, 또 그렇게만 한다면 교회는 필연적으로 질적으로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조그마한 식당하나를 해도 적당히 해서는 잘될 수가 없다. 손님의 입장이 되어 반찬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일 없이 갖은 성성을 다해 개발하고 맛깔스럽게 발전시켜 간다면 식당이 안 될 리가 없다. 젓가락 가기가 꺼려지는 음식으로 손님 많기를 바라다보니 실패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업이 교회개척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믿음의 글 쓰는 것을 소망으로 가지게 됐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라는 전도를 하고 싶어 무던히도 애를 써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장거리 이동 때면 버스나 열차의 옆 사람에게 전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을 걸 기회를 노리다가 어떻게든 전해 보지만 서툴기 짝이 없이 끝나고 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도의 성과는 없고 부담감만 늘어 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문서선교였다. 문서선교라 해도 어떠한 단체에 가입을 한다든지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음의 글을 쓰는 정도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가 되는 것인가를 생각한 필자는 크리스천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지시하신 방법대로 사는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생각한 것을 글로 쓰려 했다.

 

그런 필자는 글을 쓰기 위해 신학을 하기로 했다. 글이 안다고 써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고는 쓸 수 없기에 신앙에 대한 학문인 신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글은 문재(文才) 없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필자에게는 그 문재라는 것이 없다. 없는데 써야 하니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했다. 필자는, 문재는 없지만 다행히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노력이 힘들다기보다 즐겁다. 아니 드는 힘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씨는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라고 말하고는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간다고도 말한다. 필자도 최명희 씨 같지는 않지만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짤막한 글 한 편을 쓰는데도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 많이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문장 중의 어떠한 자리에 들어갈 가장 잘 맞는 단어는 단 하나뿐이라는 문장작법의 기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장이 이상하게 느껴지면 그 부분을 몇 번이고 고쳐 쓴다. 어순을 달리해 보기도 하고 단어를 바꿔 보기도 한다. 문단 하나를 나누는 데에도 많은 생각을 한다. 토씨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편집자가 요구한 원고 매수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필자는 원고의 마감시간에 쫓기며 글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미리미리 써서는 읽어 보고 또 읽어 보며 고칠 것이 나오면 고친다. 대학 현직시절에는 논문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면 발표의 신청을 아예 하지 않았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글이, 학자에게는 논문이 자존심이요 자긍심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마땅히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인격이 없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자만심을 자존심으로 착각을 하면 안 된다. 자존심은 인격을 만들지만 자만심은 인격을 파괴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만심 아닌 자존심은 노력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노력을 하되 사도(邪道) 아닌 정도(正道)를 걸으며 한다면 그것이 자존심을 만들어 인격을 높여 줄 것임에 틀림없다.

 

글 쓰는 사람에게 글이 자존심이 되고, 학자에게 논문이 자존심이 되듯, 아니 그 이상으로 목회자는 목회가 자존심이 돼야 한다. 큰 교회를 만들었다고 으스대는 자만심이 아닌, 교회는 비록 작지만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기도하며 있는 힘을 다했기에 어느 정도라 할지라도 성도들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빛으로, 향기로, 또는 소금으로 살고 있다는 데에서 생긴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겸손으로 잘 다듬어진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개척을 하려면 시작하기 전에 자신에게 목회를 위한 은사가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은사가 없다면 아무리 신학을 하고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해도 목회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포기하고,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그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좋다.

 

은사가 있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힘이 든다 해도 넓은 길 아닌 좁은 길로 가겠다고 하는 각오가 필요하다. 대형교회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비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고, 교회세습이나 물질 많이 모으면 그것이 곧 축복이라는 식의 반 기독교적 행태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개척은 하나님을 위하고, 교인들을 위하고, 나와 내 가족도 위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신 은사에 맞게 사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임종석 목사 /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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