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40대 이상의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연탄에 대한 추억하나쯤 없는 이는 없다. 가슴 아픈 아련한 추억이 몇 개는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연탄은 ‘부와 가난의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집은 그럴만한 형편이 못되어 그저 두세 장씩 새끼줄 꿰어 몇 묶음 사두는 게 고작인데, 누구네 집은 겨우내 쓰고도 남을 연탄을 수북이 쌓아둔 것을 보면 솔직히 너무 부럽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다. 연탄 한 번 갈라치면 코를 막고 얼굴 돌리던 일들, 그 22개 구멍 다 맞추느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가 그만 가스까지 마셔 머리 핑 돌던 일들. 때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연탄불 다 꺼뜨려 번개탄 사다가 다시 지피던 일들, 그게 안되면 나중에 어머니 돌아오시면 혼날까봐 결국 옆집에라도 가서 급히 밑불 빌려 채워놓던 일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밤에 잠들기 전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스배출기 켜놓는 일. 방으로 통하는 부엌문은 닫고 밖으로 통하는 부엌문은 반드시 열어두는 일. 연탄구멍도 한두 개 정도만 열어두어야 한다. 연탄을 막 갈았을 때 열어둔 모든 구멍을 깜빡하고 못 닫으면 그날 밤은 타죽을 정도로 방만 뜨겁다. 그 불은 다음날 새벽까지 못 간다. 멀쩡한 장판만 다 태운다. 어디 그런 일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특히 무서웠던 건 역시 연탄가스중독이다. 그 시절 아침 뉴스에 반드시 등장했던 소식. “어디에 사는 누구네 집 가족 모두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물론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스 때문에 학교를 못갈 정도의 가벼운 중독은 부지기수였고, 한번은 죽을 정도로 가스를 마시는 바람에 온 부산 시내를 다 헤매다가 산소통 있는 병원을 겨우 발견하여 목숨 건졌던 일도 있었다. 그 때 의사선생님 말씀으로는 “이 아이는 만약 살아도 평생 바보가 될 가능성이 많다” 하셨다 한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의 내 모습은 참으로 기특할 뿐이다.
물론 이 연탄에 대한 추억이 그리 슬픈 것만은 아니다. 재미도 있었다.
다 타버린 맨 아래 연탄을 떼어내기 위해 들어 올릴라 치면 언제나 위의 것과 붙어있기 일쑤. 그러면 숙달된 조교가 시범이라도 보이듯 계단 모서리를 정확히 겨냥하여 스냅을 줘 말끔하게 떼어내던 일은 그 중 간간히 맛보는 재미였다.
게다가 그 연탄에 뚜껑을 덮어 고무호수로 연결하여 큰 물통을 데우면 겨우내 따뜻한 물을 맘껏 쓰는 호사도 누렸다. 게다가 설탕 한 숟갈과 베이킹소다 조금을 국자에 담아 연탄불위에 올려놓고 휘저은 후 뒤집어 눌러 펼쳐놓고는 별모양, 하트모양을 만들어 바늘로 콕콕 찍어 그 모양대로 떼어내며 먹는 그 달고나의 맛은 지금도 입맛을 다실정도다.
그런데 누구에겐 이렇게 ‘추억’이 되어버린 이 연탄이 지금까지도 ‘현실’인 가정이 있다. 바로 얼마 전 우리 교회가 ‘사랑의연탄나누기’ 행사를 하면서 확인한 어려운 이웃들이다. 20-30년 전 그 삶을 지금도 살고 계신 분들. 그들인들 기름보일러로, 도시가스로 바꾸고픈 마음이 왜 없을까?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안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연탄이 그래도 제일 싸니까. 그런 점에서 너무 고맙다. 해마다 12월이면 우리 교회는 ‘사랑의천원모으기’ 행사를 통해 한 성도가 천 원씩 열 명의 정성을 이웃들로부터 모아 교회에 헌금하면 그 모아진 헌금으로 해마다 이렇게 ‘사랑의연탄나누기’ 행사를 펼친다. 이미 우리 교회의 이 아름다운 선행은 오산시에 널리 알려져 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헌금을 모으신 성도들에게도, 헌금에 참여해주신 그들의 지인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래서인지 올 겨울은 유난히 더 따뜻한 것 같다.
김종훈 목사 /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