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늘 새로울 것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뻔한 일상들. 과연 그 일상들은 얼마나 위대할까?
오늘 아침도 역시 스스로 일어나기는커녕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5분만 더”를 외치며 여전히 이불쟁탈을 벌이는 엄마와 딸의 일상. “오늘도 늦었다”면서도 머리는 꼭 감아야 하고 고데기는 꼭 대야하는 사춘기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일상. 둘러앉아 아침밥 먹는 일은 꿈도 못 꾸고 토스트 하나조차도 겨우 한입만 베어 먹은 채 “다녀오겠습니다”라고만 외치며 뒤도 안돌아보고 뛰쳐나가는 딸의 일상. 과연 등교차라도 잘 탔는지 걱정되어 베란다로 내다보며 한 번 더 “잘 다녀와” 인사를 건네는 엄마를 그제야 보고는 “어, 엄마”라며 살인미소 한방과 손 한 번 흔드는 것으로 미안함을 때우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아침의 분주함을 일단락 짓는 엄마의 일상. 이렇게 아침마다 반복되는 이 일상들은 과연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할까?
역시 오늘 밤에도 학원 두 개를 들러 집으로 돌아온 아들,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조차 힘없어 보여 등에 맨 가방 받아주는 것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덜어보려는 엄마와 아들의 일상. 그래도 엄마 마음엔 얼른 씻고 방에 들어가 조금만 더 공부했으면 좋으련만, 통닭 한 마리를 시키더니 그 통닭 먹는 걸 핑계로 TV앞에 앉아 아빠랑 ‘정도전’이나 ‘다시보기’로 보고앉아 있는 뻔뻔한 아들과 그것을 묵과하는 개념 없는 아빠의 일상. 그러면서도 “주말엔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했다”며 “돈 좀 달라”며 평소에 안하던 안마공세까지 날리며 징그러운 애교로 졸라대는 그 아들의 당당함에 못내 그 하루의 고단함을 일단락 짓는 엄마의 일상. 과연 이 일상들은 정말 위대할까?
새삼 작금에 일어난 아까운 생명들의 희생을 보며 문득 그 생각이 진하게 다가온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지를 다시 깨닫는다. 일상에선 혹 짜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일순간 사라져 버렸을 때에는 그 짜증도 사치였음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 짜증조차 그리워지는 것이다.
아~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 같다. 있을 땐 몰랐다가도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되는 이 어리석음. 이 어리석음이 참으로 부끄럽다. 그 익숙함이 무섭다. 익숙함에 묻혀버린 소중함이 우리의 행복을 막는 적(敵)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나는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익숙한 아내, 익숙한 두 딸은 말할 것도 없고, 익숙한 동역자들과 익숙한 성도들을 만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가? 새삼 그들의 소중함과 존귀함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강단에 오르면 늘 익숙한 얼굴, ‘오늘도 저 자리에 저분이 앉으셨네’ 이렇게 확인하는 순간 설교자로서 마음이 얼마나 편하던가? 집에 들어가면 늘 익숙한 얼굴, 그 아내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남편으로서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던가? 요 며칠 지방에 일이 있어 내려갔다 온 아내의 빈자리는 그래서 더 커보였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의 익숙한 그들은 지금 내 마음의 공간을 채워주고 있다. 허전하지 않도록 메꿔주고 있다. 그들이 너무 고맙다. 그들의 존재론적 가치(Ontological Value)가 너무 귀하다.
그러니 이따금 잘해주는 이보다 늘 곁에 있는 이들에게 분명 더 잘해야 한다. 가까이 있다고 덜 소중한 것이 아니다. 가까이 있으니까 더 귀하다. 익숙하니까 더 고맙다. 그러니 떠난 뒤에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하자.
김종훈 목사 /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