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부활현현 사건에서 제시된 예수의 말씀들의 많은 부분을 사도행전의 시작 부분에서 사도들에게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로 다시 제시했다. 사도행전 1:4~8에는 누가복음 24:44~49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이 상당 부분 반복된다.
특히 누가복음 24:47~49에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예고되고 사도행전 1:4~8에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이 반복된 것은 누가복음에서 사도행전으로 옮겨가는 서사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또 다른 특징은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씀들과 사도행전 1장에서 그것의 상응하는 부분 둘 다 예수의 승천 사건으로 맺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 부분에는 약간의 조화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의 승천은 40일 동안의 부활현현 사건들 후에 이루어진 반면(행 1:3), 누가복음에서는 부활절 당일 저녁에 일어난 것으로 제시된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현현 사건들이 부활절 당일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된 것은(눅 24:13, 36, 44, 50) 사건들의 극적인 강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다른 관심사들로 인하여 누가복음과의 차이점을 남겨놓았다.
누가는 부활현현 사건의 마지막에 예수의 승천 장면을 간략하게 묘사한다(눅 24:50~53). 그는 먼저 장소를 베다니로 언급한다(눅 24:50). 베다니는 복음서 전승에서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많이 언급된 지명이다(마 21:17/막 11:11; 마 26:6/막 14:3; 막 14:3; 11:1, 12; 14:3; 요 1:28; 11:1, 18; 12:1). 승천이 일어난 시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승천은 부활현현의 다른 사건들과 같은 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승천 장소는 감람산이 언급된 사도행전 1장의 승천 장소와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베다니는 감람산의 동쪽 지역과 겹치기 때문이다(막 11:1).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의 일치에 의문을 던지는 견해들이 있지만, 누가는 복음서에서는 부활현현의 초기 국면을 다룬 반면 행전에서는 최종 국면을 강조한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예수는 베다니 앞까지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먼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축복하다’는 동사는 누가복음에서 많이 사용됐다(1:42, 64; 2:28, 34; 6:28; 9:16; 13:35; 19:38; 24:30). 손을 들어 축복하는 행동은 엄숙함의 표시이며 행사의 종결을 나타낸다.
유대교의 명절과 축제 전통에서 축도는 자주 중요한 행사를 종결하는 시점에서 행해졌다. 여기서 예수는 마치 제사장으로서 행동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누가는 예수의 직무 중 제사장으로서의 직무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예언자와 교사로서의 직무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수의 축복하심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예수의 이 마지막 행동은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돌보심에 대한 표현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는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다(눅 24:51). 손을 들어 축복하시는 상태로 승천하시는 예수를 그린 많은 서구의 그림들은 누가가 여기서 묘사한 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예수의 떠남을 묘사하기 위해 누가가 여기서 사용한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누가만이 드물게 사용했다(눅 22:59; 24:51; 행 27:28). 누가는 초자연적 존재들의 떠남에 관해서는 여러 번 언급했다(눅 1:38; 2:15; 9:33; 24:31; 행 10:7; 12:10).
여기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눅 24:51)라는 문구가 대다수 사본들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소수의 사본들에서는 생략되었다. 전에는 생략된 사본에 무게를 두는 견해가 우세했었는데, 최근에는 포함된 사본에 무게를 두는 견해가 우세해지고 있다.
누가-행전에서 승천은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사건이면서 또한 영원한 메시아로서 보좌에 앉으시는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우편에 승귀하심(올리우심)를 나타낸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보좌로부터 그의 일꾼들에게 선물들을 주신다(행 2:30~36). 어떤 사람의 최후가 하늘로 올리운다는 사상은 고대 세계에서는 낯선 것이 아니다(cf. 왕하 2:11). 예수의 수난에 관한 첫 번째 예고 직후에 그가 장차 “세상을 떠나실 것”이 언급됐는데(눅 9:31), 그의 떠남의 결과는 “올리우는 것”으로 묘사됐다(눅 9:51).
예수의 떠남은 의례적인 축복과 함께 이뤄졌다. 창세기 49장과 신명기 33장은 야곱과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시한 광범위한 축복이 나온다. “손을 들어”라는 표현은 제사장의 축복을 나타낸다(cf. 레 9:22).
후에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한 재판 과정에서 그가 그리스도인지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으리라”는 대답으로 그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제시했다(눅 22:69).
예수의 승천은 바로 이 말씀을 확증하는 사건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거부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들로 인정하시고 그리스도로서의 그의 존재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그 보좌에 앉으시고 그것과 함께 부여되는 권위를 받으실 때가 된 것이다.
예수의 승천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실행자가 되신 것을 나타내며 그런 실행자의 권위는 성령의 강림과 사도들의 담대한 복음 선포를 통해 표현됐다(행 2:30~36).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고 묘사된다(눅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했다”구절은 25:51에서 “하늘로 올려졌다”는 구절이 생략된 사본들 중 일부에서 마찬가지로 생략되었다. ‘경배하다’라는 헬라어는 존경의 표시로 엎드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대개 지극히 높은 권위자에게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몸짓이다. 마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나올 때 자주 표현됐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이곳이 처음이다. ‘경배하다’로 표현된 이 행동은 70인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몸짓 뿐 아니라 크게 존경할 대상인 사람들에 대해 사용됐다(창 42:6; 왕상 24:9).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단 한 번만 사도가 경배를 받았을 때, 그 행동은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되었다(행 10:25~26). 이것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가리킨다. 성경과 예수의 말씀들과 부활현현의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를 존경하는 선생님에서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는 언급은 예수의 지시에 순종하기 시작한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출생 시에도 그의 떠남에서도 큰 기쁨이 찾아왔다(2:10). 누가복음의 예수 이야기는 그것이 시작된 도시 곧 예루살렘에서 끝을 맺는다.
부활현현과 승천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임한 “큰 기쁨”(눅 24:52)은 부활현현의 경험 때 제자들에게 임했던 기쁨과 아울러 “믿지 못함”(눅 24:41)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제자들의 신앙의 큰 진전을 나타낸다. 제자들의 영적인 눈을 가리고 있던 소경됨과 믿지 못함을 이제 완전히 극복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를 향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확신 속에 주어지는 그들의 기쁨과 감사를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으로 갔다. 누가복음에서 사건들은 그것들이 시작된 장소 곧 성전에서 끝난다. 누가는 제사장 사가랴가 예기치 않게 하나님의 약속의 도래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해 하나님의 축복의 도래를 기대하는 제자들로 끝을 맺는다.
누가는 제자들이 지속적으로 성전에 있었다고 언급한다. 제자들이 성전에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기대와 기다림을 나타낸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 하나님은 올리우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기쁨으로 드리는 제자들의 찬송을 받으신다.
누가복음에서 이야기의 시작은 성전에서 이루어졌으며(눅 1:8~23), 또 ‘기쁨’은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였다(1:14; 2:10). 더구나, 축복의 주제는, 그것이 예수의 축복이든지(눅 25:50) 혹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든지(눅 24:53),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주도적으로 나온다(눅 1:42, 64, 68; 2:28, 34).
특히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마지막 표현은 사가랴와 시므온의 찬양시들과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이 예언자들이 미리 축하했던 것이 이제 성취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누가의 예수 이야기는 시작의 주제들로 돌아감으로써 종결에 이른다.
그러나 누가의 이야기에서 종결은 끝이 아니며 성취는 완결은 아니다. 누가복음이 예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이제 완결됐다. 그러나 세상의 인물로서의 예수 이야기는 단지 더 큰 이야기 곧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가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며 그 이야기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