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담에 “개 팔자”란 말이 있다. 개는 자유롭게 뛰놀며 돌아다니며 산과 들도 놀이터로 알고 즐기며 사는 동물이라서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데서 개 팔자란 말이 나왔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그냥 논다.
옛날 동네 개들의 목에는 목줄이 없었다. 집집마다 개들이 있었고 그 개들은 집단적으로 무리를 이루어 동네를 배회했다. 어쩌다 낯선 객이 동네에 들어오면 짓는다. “여기 낯선 사람이 왔습니다. 동네 어른신네들” 밤에 도적 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개는 똥을 좋아한다. 아기의 똥을 아기엄마가 “워리 워리”라고 외치면 동네 큰개들이 몇 마리씩 달여 왔다가 그 중에 제일착으로 도착한 놈이 어린 아기의 똥을 받아먹고 혓바닥으로 아예 똥구멍까지 핥아서 깨끗이 청소해 주기도 했다. 먹는데에 눈치 볼 것이란 전무했다. 귀저기가 없는 50년대에 개들은 그냥 고마웠다.
해가 지고 어둠이 오면 놀던 개들은 제각기 자기 주인집으로 찾아간다. 엉뚱하게 다른 주인집으로 가는 실수는 결코 없었다. 암놈이 낳은 강아지 새끼들을 이집 저집으로 입양해줘도 어미 암캐는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가봤자 이웃집으로 가는 것이니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미 개는 강아지 새끼가 자기 곁을 떠나도 “평안해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라고 노래를 불렀다.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농촌에 여름철 보신이 필요하면 이미 오래 산 똥개는 순순히 자기차례를 알고 주인에게 마지막 견생(犬生)을 바친다. 이것도 견공(犬公)의 자유의사에 한 것이다. 아니 견공의 평화이다. 요는 옛날 개들은 자유로운 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의 견공들의 생애를 보자. 우선 이름이 똥개가 아니다. 애견(愛犬)이라 하고 “똑순이”, “발바리”, “하리”, “춘복”이니 하는 가하면, 어떤 이는 “내새끼” 하면서 아예 가족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 침실을 같이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날의 특별 이름을 지닌 가족 개는 일단 쇠로된 개 목줄을 달고 있다. 주인이 외출할 때 동반자로 따른다. 주인은 겨울이면 춥다고 개 옷을 입힌다. 그러나 개는 개털이 있어서 개 옷이 거추장스럽다. 여름에는 시원하라고 아예 개털을 개미장원에 가서 싹 밀어 재킨다. 그러나 개는 살갗으로 땀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혀 바닥을 내밀음으로써 열을 발산하는 것이어서 이발 필요 없다.
이게 다 주인이 그 개에 내린 규범이요 규정이요 수칙이요 율법이다. 주인은 “너는 내가 정한대로 생활하라”고 한다. 그러나 개는 말할 것이다.
“주인님,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개입니다. 개를 개 되게 놓아 주세요”
아파트 베란다에서 커피 한잔을 하면서 내려다 볼 광경 하나. 주인이 목줄 멘 강아지를 끌고 워킹을 하는데 이놈의 개가 전봇대에 오줌을 싸고 싶었던 것이었다.
개가 길을 가다가 어떤 물체나 담벼락에 오줌을 싸는 것은 그놈이 귀가할 때 방향을 알기 위한 개 본연의 본능적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은 아랑곳없이 오줌 싸려는 개를 강제로 잡아 당겨서 자기와 동행 시키고 있었다.
주인이 혹 그런 개의 본능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걱정 말라, 내가 너를 이끌어 줄테니” 그러나 개는 주인의 이끌림 보다는 본능에 의한 오줌싸게로 귀가하는 것을 더 자유롭다 했을 것이다. 문제는 모든 개들의 외침이 있다.
“제발 주인들이여! 율법에서부터 행방시켜주오” 오늘 날 목줄에 메인 개는 산천을 주유천하(周遊天下)하던 옛 선조 개들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