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호부터 요한복음에서 제시된 부활현현의 체험과 그 속에 담긴 부활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부활현현 사건은 예수의 시신을 놓아두었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빈무덤 사건으로 시작한다.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여성 제자 막달라 마리아가 홀로 무덤을 방문하고 그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 후에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달려가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말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0:2).
그녀가 ‘달려갔다’는 말은 직접 표현되지는 않은 그녀의 놀라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마태는 그 무덤을 방문했던 여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관한 천사의 말을 듣고는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말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고 말한다(마 28:8).
그러나, 요한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에서 돌이 치워진 것을 발견한 그녀의 감정은 놀라움과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찾아간 사람들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가 사랑하신 그 제자였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그 다른 제자”라는 말은 “또 다른 사랑 받은 제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는 다른 제자로서 “예수의 사랑 받은 그 제자”를 가리킨다. 요한은 그 제자의 정체를 분명히 나타내기 위하여 “예수가 사랑하시던”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인다. 그리고 다음 절부터는 단순히 “그 다른 제자”로 부른다(20:3, 4, 7).
예수의 고별 만찬 때부터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는 여러 차례 함께 등장한다: 고별 만찬(13:23), 예수의 심문(18:16), 그리고 빈무덤과 예수의 현현. 마리아가 베드로와 그 제자에게 한 말은 예수의 부활과 관계된 오해와 무지를 반영한다. 마리아는 그 무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갔다”는 말은, 마태가 언급한 것으로서(마 28:13~15),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소문이 유대인들 중에 퍼지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한다. 그녀의 말에서 “사람들이 가져갔다”라는 익명의 삼인칭 복수 주어가 사용된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예를 들어, 동산지기, 20:15)이 가져갔다는 또 다른 소문을 반영한다.
마리아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녀는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것으로만 생각했다.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예수의 존재의 결말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를 나타낸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그 무덤에 둔 것에 근거하여 그녀는 예수의 시신을 두었던 곳만을 생각했다. 마치 누가복음에서 그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에게 천사들이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말한 것과 같이(눅 24:5), 마리아는 무덤에 묻힌 죽은 예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통하여 마리아를 아직은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존재의 결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표적 인물로 제시한다. 나다나엘이 예수의 참된 기원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또 베드로가 예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만을 찾으면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만을 부각시킨다.
고별 강화에서 예수는 그가 떠나가야 한다는 것, 그가 가는 곳에 제자들이 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한 바 있다. 요한은 빈무덤 전승을 사용해 예수의 말씀에 담긴 이 주제를 이야기 방식으로 발전시킨다.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 혹은 그가 어디에 있는가의 질문은 예수의 존재와 관련해 이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제시된 뜨거운 쟁점이다.
불신의 유대인들은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7:11, 22; 8:14, 28, 42). 제자들도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14:3, 18, 20, 23, 28). 요한은 그 질문에 대하여 이미 대답을 했다: 예수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뿐 아니라(13:1~3; 14:12, 28; 17:21~26),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거하실 것이다.
저자는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그 제자의 반응을 묘사한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20:3). 복음서 초기 전승들은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빈무덤을 발견했으며 예수께서 그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에는 반대적 성격의 전승들이 발전했다.
예를 들어, 마태는 그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자들에게 부활의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을 전달하는 반면(마 28:8~9), 누가는 베드로만이 빈무덤에 가서 여자들의 말을 확인한 것으로 말한다(눅 24:12). 반면에 요한은 두 제자가 빈무덤을 확인했으며 그 후에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한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라는 한글 번역은 원문의 미묘한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나갔다’는 동사의 주어가 단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어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다른 제자에 관한 묘사에는 동사가 생략되었다.
그 다른 제자도 ‘나갔다’는 동사에 포함되려면, 그 동사가 복수형으로 표현됐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는 단수형으로 되어 있어서, ‘나갔다’는 동사는 베드로의 행동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무덤에 갔다”는 구절에서 동사의 주어는 복수형으로 표현되어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에 간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나갔다”는 말은 그가 실패한 후에 숨어 있던 장소에서 밖으로 나간 것을 암시한다. ‘나갔다’는 동사가 강조적으로 문장의 맨 앞에 위치한 것도 베드로의 상황 곧 그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 자책감과 괴로움 속에서 숨어 지내던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간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동사가 그 다른 제자를 포함하는 것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실패한 베드로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그의 신앙과 예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킨 그 다른 제자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들이 무덤으로 ‘갔다’는 동사부터는 복수형 주어가 사용됐다.
저자는 두 사람의 차이를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20:4~5). 두 사람은 함께 달려갔다. ‘달려갔다’는 동사는, 마리아의 경우에도 사용된 것과 같이, 그들이 매우 급박하게 서둘렀던 것을 나타낸다.
그 다른 제자는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굽혀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고 무덤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예수에 대한 그의 모범적 사랑이 그로 하여금 제일 먼저 무덤에 가게 만들었다(20:4).
“그가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말은 그 제자의 신앙을 무덤 방문의 절정으로 삼기 위한 목적에서 빈무덤을 처음 본 사람이 부활신앙을 가진 첫 번째의 사람인 것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몸을 굽히다”와 ‘들어가다’는 단어들은 그 무덤이 옆으로 파진 것을 나타낸다. “몸을 굽히다”는 동사는 마리아(20:11)와 베드로(눅 24:12)의 동작에서도 사용됐다. 그 다른 제자는 예수의 몸을 향품과 함께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문맥에서 이야기의 상황이 점전적으로 묘사된다: (1)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다(20:1); (2) 그 다른 제자는 세마포가 무덤 안에 놓여 있은 것을 본다(20:5); (3) 베드로는 세마포와 함께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따로 개켜 있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 예수의 부활과 관계된 중요한 사실들이 점진적으로 묘사된다.
이 문맥에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기됐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경쟁적이었다든지,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젊었기 때문에 더 빨리 뛰었다든지, 혹은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그 지역을 더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지름길로 무덤에 갔다는 견해도 있다. 저자는 두 사람 중에서 특히 그 다른 제자의 행동에 주목한다.
무덤에 처음 왔던 그 제자가 결국 “보고 믿은” 처음 제자가 된다(20:8). 그를 따라온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 무덤 안의 상황을 파악하지만, 그의 반응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 다른 제자의 우선성은 ‘뛰었다’와 ‘먼저’라는 단어들을 통해 음성학적으로 표현되고 특히 이야기의 발전 과정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다고 베드로의 역할이 무시된 것은 아니다. 그는 무덤 안의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입증하는 매우 중요한 물증이 된다. 따라서 두 사람의 역할이 주어져 있지만, 그 다른 제자가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제시된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