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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학(5)


필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개인적으로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천사들의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활하신 예수와 마리아 사이의 대화를 제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20:15).


 예수는, 천사들이 했던 것과 같이, 부활의 소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마리아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의 존재의 결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예수는 두 개의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천사들이 했던 질문의 연속으로서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는 것이며 둘째는 그를 따라온 첫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서 “네가 누구를 찾느냐”는 것이다(1:38). 첫째 질문은 마리아로 하여금 그녀의 현재의 부정적인 심리 상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예수는 마리아를 죽음과 슬픔의 과거로부터 이끌어내는 선한 목자로서 그녀에게 접근한다. 둘째 질문은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로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에 관한 질문이며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를 통하여 독자에게 던지는 저자의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리아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며 추구하고 있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가 자기 앞에 서있는 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는 말은 이 장면이 그 무덤이 위치했던 동산에서 일어나고 있던 것을 상기시킨다. 동산에서 일어난 점에서 이 장면은 예수의 체포 장면과 평행한다. 이것은 또 성서(창 2~3장; 요 18장)에서 언급되는 동산의 이중성 곧 친밀함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배반의 장소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마리아의 대답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예수의 시신을 다른 곳에 가져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막연한 ‘그들’에서 동산지기인 ‘너’를 지목한다: “만일 당신이 옮겨갔거든.” 그녀의 질문의 전제문이 제1조건문에 강조형 이인칭 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그녀가 그 동산지기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을 표현한다. 예수의 시신이 사라짐으로 인한 고통과 그것을 찾으려는 열정이 그녀의 눈을 가려 그녀 앞에 서있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부활의 예수를 인식하게 되는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높인다. 그녀는 공생애의 예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떠남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이 혹은 동산지기가 그를 어디에 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덤에 두었지만, 그는 더 이상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


저자는 그녀가 어떻게 그 분이 예수인지를 알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20:16). 예수의 존재에 관한 그녀의 인식의 변화는 예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예수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로서 자기 자신을 그녀에게 계시한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과 같이(10:3, 16),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과 어조는 그녀로 하여금 화자의 정체를 인식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이 대면은 예수의 계시에 관한 중요한 원리를 제시한다: 부활의 주님은 그를 믿고 간절히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의 음성은 그녀로 하여금 예수의 존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만들었다. 마리아는 예수를 향하여 돌이켰다. 그녀의 바로 앞 행동에서 그녀는 “뒤로 돌이켰다”고 언급되었다(20:14). 뒤로 돌이켰다는 것은 빈무덤의 확인과 천사들의 질문을 받고도 그녀 자신의 부정적인 관점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서 ‘돌이켰다’는 말은 그녀의 몸을 돌리는 행동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주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의미를 포함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마음을 살아계신 주님께로 돌리는 회심이 필요하다.


그녀의 내면의 눈이 열리면서, 그녀는 예수가 살아계신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생애의 예수를 향하여 제자들이 가장 친숙하게 불렀던 칭호를 사용하여 ‘랍오니여’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아람어이다. 그녀는 예수의 살아계심을 발견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예수를 여전히 “나의 선생님” 곧 그녀가 예전에 그와 가졌던 관계의 칭호를 사용하여 부른다. 이것은 ‘랍오니’라는 말이 선생님을 가리킨다는 저자의 설명에서 확인된다.


그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영광의 사건인 것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제부터는 예수를 단지 한 사람의 현자(선생님)로 아는 것은 부적절하다. 부활의 예수는 그 이상의 존재로 변형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예수를 향한 가장 적합한 칭호는 앞으로 도마가 사용할 “나의 주 나의 하나님”(20:28)이다.


저자는 예수의 살아계심을 발견한 마리아에게 그녀가 새롭게 알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20:17).


이 구절은, 그 중에서도 상반절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래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문법적으로는 현재 부정 명령형인데, 그것은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중단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문법적 의미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나를 만지던 것을 중단하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의미는 막달라 마리아가 “나의 선생님” 하면서 예수를 잡았든지 혹은 잡으려고 했던 상황을 연상하게 만든다.


“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단순히 신체적 행위의 금지로 이해하면,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는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초월자의 존재가 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말씀은 예수의 존재가 변형된 상황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씀도 단순한 신체적 행위의 금지 그 이상의 영적인 혹은 심리적인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 마리아의 신체적 행위는 그녀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앞에서도 제시되었다(예, “뒤로 돌이켰다” 혹은 ‘돌이켰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말씀도 신체적 행위의 금지를 통하여 그녀가 예수에 관하여 지금까지 가져왔던 입장과 시각의 변화를 추구하는 내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마리아는 지금까지 예수를 한 분의 지극히 존경하고 따르는 선생님으로 알아왔다. 그런 분의 죽음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과 슬픔과 아픔을 주었으며 그래서 그녀는 예수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예수를 다시 발견한 후에도 그런 입장과 태도를 갖고 예수에게 다가왔다.


마리아는 예수에 관하여 그녀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고정관념을 그대로 갖고 예수를 만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명령은 “나를 신체적으로 만지지 말라”는 의미보다는 “과거의 내게 매달리기를 그쳐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의미는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중단하라는 현재 부정 명령형의 문법에도 적합하다. 그렇게 보면, 이 말은 신체를 가진 존재로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과거의 예수를 대하던 종래의 입장을 갖고 “내게 다가오는 것을 중단하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마리아는 왜 예수에 대한 그녀의 입장과 태도를 바꾸어야하는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는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과 올리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복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의 존재의 이러한 변형을 그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요한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존재로 표현되었다(7:33; 13:3; 14:12, 28; 16:28). 예수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이 완성된다. 이렇게 예수가 영광을 받으면, 보혜사가 예수를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공생애는 그의 때 곧 그가 영광을 받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절정의 때를 향하여 진행되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와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은 예수의 영광스럽게 되심에 관한 요한의 입장을 반영한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과 올리우심을 통하여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존재로 변형되었다. 도마의 고백과 같이 예수는 이제 “주 하나님”이라는 영광의 존재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이제부터는 신체의 몸으로 활동하던 과거의 예수에게 매달리는 것을 중단하고 보혜사로 오시는 새로운 예수에게 매달려야 한다. 예수의 부활은 그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보다 더 영적이고 친밀하며 영원한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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