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한 구석에 놓여 있던 군자란이 겨울을 이겨내고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옹색한 가운데서도 온도와 햇빛과 영양분이 균형을 유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양과 지식과 건강이 균형을 유지해야한다. 어떤 사람은 몸은 건강한데 의지력이 약해서 언제나 시작한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은 많은데 판단력이 약해서 평생 남의 말만 듣고 남의 주장만 따른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모두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목회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교에 힘을 다하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구제와 사회참여에 힘을 기울이는 교회가 있고, 성경공부에 힘을 쏟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기도와 집회에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있다.
어느 것도 좋다 나쁘다 하거나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므로” 은사대로 목회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교회의 기본적 기능인 예배와 전도와 교육과 봉사의 균형을 잃지 않으면 될 것이다.
만약 교회가 주어진 여러 기능을 조화롭게 실천하지 못하고 선교에만 치중(쏠림)하다가는 교회가 아닌 선교단체와 같이 될 것이며, 구제에 치중하다보면 사회사업단체와 같이 될 수 있으며, 성경공부에만 치중하다가는 신자를 복음전도자가 아닌 신학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며, 복음은 덮어두고 사회정의부터 외치다가는 정당이나 시민단체와 다를 바 없는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잠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수께서는,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의 수단으로 대제사장으로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기 위하여, 사탄의 역사(役事)를 깨뜨리기 위하여, 그리고 바른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이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이 중 어떤 것 하나 만을 강조하고 다른 것을 모두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오직 율법만 받들고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교신앙도 이와 같은 유형의 하나일 것이다.
한국교회 안팎에서도 이와 같은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사탄의 역사를 깨뜨리기 위해 오신 것만을 강조하다가 귀신론에 빠진 교회, 신자의 의무는 제쳐두고 오직 구원만 강조하다가 구원파가 된 이들과 이와는 반대로 거룩하고 절제된 삶만을 강조하다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버린 기독교 공동체들, 또한 재림과 심판만 강조하다가 종말론 이단에 빠진 신앙촌과 신천지 등등 헤일 수 없이 많다.
균형감각은 인격과 목회의 필수요인. “강조”는 좋으나 “치중”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