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軍)에서는 각 종교의 3대 절기라는 것을 종교업무에 포함시켜 놓았는데, 거기에 보면 기독교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절기를 지내고 있는 성도들을 보면, 가끔은 성도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절기를 지나고 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성탄절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그 중심 분위기로, 추수감사절은 결실에 대한 감사로, 부활절은 “주님께 영광 할렐루야!”로 그 특화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지내니까 사실 별로 생각할 것이 없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의 판단과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과연 적절한지 한번쯤은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 부활절은 사순절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무시할 수 없는 긴 절기의 끝에 찾아오는 절기로, 그 마지막 주가 고난주간으로 되어 있고 그 마지막을 부활절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중심 분위기는 또 “고난당하는 어린양 예수”입니다.
그러다보니 각 절기마다 성도들이 지어야 하는 표정이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것만 같습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마냥 웃고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으면 집안이나 개인적으로 큰 불상사가 있다고 오해받기 쉽고, 사순절과 고난주간은 웃음기를 빼고 매우 경건한 표정과 금욕적인 생활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교회 생활을 해오면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성도들이 교회 절기가 어떻게 지나가든지 지금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에 따라 표정 짓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만약 임박한 절기가 또는 지나고 있는 절기가 자기가 처한 현실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거나, 또한 신앙적 논리로 자신을 설득할 수가 있다면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따를 이유도, 여유도 없는 것이 성도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방금 지나간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한 교회들의 안내를 보면, 7세기경 서방교회에서 세운 규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사순절 기간 동안에 음주, 가무, 영화/연극 관람,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를 금하고, 화려한 옷을 입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호화 생활을 자제하면서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을 권장하는 것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성으로 인한 경건이 지배하는 절제와 선행이라고 한다면 문제 삼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득 ‘예수님께서 혼자 고난당하시는 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우니까 우리가 일부러 불편한 삶을 살아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우기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런 행동은 “척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지 모릅니다. 성도들의 절제의 삶이 자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된다니까’ ‘사람들이 보니까’라는 이유를 가진다면 아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난주간에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고, 즐거운 만남들을 통해서 깊은 교제로 사랑과 친밀함을 확인하는 것 역시 과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난주간에 어디 놀러가려면 눈치봐야하고, 혹시라도 누가 웃고 즐거워하는 걸 볼까봐 표정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는 게 최선일까요?
이사야서 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렇게 예수님이 대신 찔리시고, 상하시고, 맞으심이 우리 허물과 죄악을 사하시고, 평화와 나음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건 원래 감사하고 기쁜 게 아닌가요?
어쩌면 고난주간은 깊은 감사함을 가지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하신 일을 제대로 인정하는 자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얼굴에 웃음기를 없애고 즐거움을 누리는 걸 절제하는 것이 최선의 경건이라고 여기는 것이, 어쩌면 주님께서 이루시고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큰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오해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 4월입니다.
배동훈 목사
육본교회 신우담당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