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재미목회중인 박창근 목사는 당시 강경교회를 시무하면서 강경교회와 지난 역사를 확실하게 밝히고 성역화에 앞장선 내용을 1992년 7-12월호까지 성광지를 통해 기고한 바 그 일부를 간추려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강경교회임을 말한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최초의 침례교회는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어떤 연유로 시작되었을까?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침례교단의 역사적 자료들을 종합 분석해 보면 1896년 2월 9일(주일), 충남 강경(江景) 북정 136번지 지병석씨 소유의 개인 집에서 미국북침례교회 소속 선교사들인 폴링(E.C Pauling)부부와 아멘다 갈데린(Miss Amanda Gardeline), 그리고 한국 사람 지병석과 그의 아내 천성녀, 이렇게 5명이 모여서 드린 강경침례교회 개척 예배가 우리 한국 땅에서 최초의 침례교회 시작이요, 오늘의 기독교 한국 침례회 총회 소속 약 3000여 교회들 중에서 첫 열매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펜윅선교사는 1889년 12월 8일 한국 땅 인천에 도착했는데 그 보다 5년 이상이나 뒤늦게 한국에 찾아온 폴링이 어떻게 강경까지 내려와서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펜윅은 재정적 지원이 빈약한 캐나다 토론토 대학 기독청년 학생회(YMCA)에서 교파 소속이 없이 독립선교사로 파송되었기에 선교에 대한 열정은 있었으나 실제로 교회를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펜윅은 처음부터 한국에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더 큰 꿈을 가지고 한국어 언어와 한국 선교 적응을 위한 훈련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3년 한국에 교회를 세우지 못한 채 카나다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국에 돌아온 펜윅은 그 선교 사역을 계속적으로 지원해 줄 후원자들을 얻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 와서 북미 지역을 순회하며 한국 순회전도단을 조직하고, 그 당시 세계 선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보스톤 클라랜돈가(Clarendon Street)침례교회 담임목사인 고든(Adoniram Judson Gordon 1836-1895)박사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펜윅은 고든 박사가 세운 보스톤 선교 훈련학교( The Boston Missionary)에 참석하게 되었고, 고든 목사가 인도하는 나이아가라 사경회에도 참여하여 영적인 재충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관계로 펜윅은 클라랜돈가 침례교회에서 선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어 그때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그 교회 성도들에게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1895년 그 교회 집사로서 사업에 성공한 씽(S. B. Thing)이라는 분의 외동딸 엘라싱(Ella Thing)의 일찍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그 이름을 따서 엘라 씽 기념선교회(Ella Thain memorial Mission)를 조직하여 폴링 부부와 아멘다 갈데린양, 이렇게 3명을 제1진 한국 선교단으로 파송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 땅에 도착하여 기존의 미남장로교나 감리교, 호주 장로교 선교회등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된 곳이 아닌 새로운 선교 지역을 찾다 보니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 경계 구역인 충남 강경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강경에서 지병석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 집과 가정을 한국 선교의 출발기점으로 그 후 금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빼기 봉우제(봉화불을 올리는 산봉우리)에 강경침례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들은 또 1896년 여름, 금강하류 뱃길을 따라 포구에 인접한 마을마다 복음을 전하여 부여군 임천면 칠산에서 장교한, 장기영(고 장일수 목사 조부)형제를 만나게 되었고, 양화면 입포리에서 홍봉춘, 원당리 포구에선 김지화, 최원여 등을 만나 그들과 함께 칠산침례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한편 제 2진으로 엘라 씽 기념선교회는 공주에 스태드맨(F. W Steadman)부부와 액클스(Sade Ackles), 엘머(Arma Ellmer)등을 파송하여 1896년 여름에 공주침례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1897년 미국 남장로교선교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에 있어서 사실상 충청, 전라 2도에서 증원된 선교사의 파송이 없으므로 충청도는 침례교회 형제들에게 그 선교지역을 넘겨 준 셈입니다.”
또한 미국 북침례교 선교지 1901년 10월호에도 “우리는 군마다 시마다 다니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친밀하다. 우리들은 침례교회 선교사역에 많은 결실을 얻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폴링부부는 1897년경 개인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소식이 없게 되자 공주에 있던 스테드맨이 강경으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니 1899년 최초의 침례식을 강경부근 금강가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그 때 침례받은 사람들은 지병석, 홍봉춘, 장교환, 김치수, 고래수, 김도정, 최춘명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인 최초의 뱁티스트들로 한국 땅에 침례교회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1990년경부터 엘라 씽 기념선교회는 재정난으로 그 선교 후원을 중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자, 스태드맨은 한국 땅에 그들이 선교사로 파송될 수 있도록 선교의 열정을 심어준 펜윅이 1897년 8월에 한국에 다시 나와서 원산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고 펜윅에게 연락하여 강경, 칠산, 공주 등을 위임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북침례교 클라랜든가 침례교회와 엘라 씽 기념선교회는 1895년부터 1900년까지 5년이상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기도와 물질로 지원하므로서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들을 강경, 칠산, 공주 등에 세우는 큰 업적을 남겼다.
한편, 원산의 펜윅은 1900년 감리교 여선교사로 한국에서 사역하던 개성 호수돈 여학교 교사와 결혼하여 그 선교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가 스태드맨으로부터 이런 소식을 듣고 1901년 9월부터는 말을 타고 강경, 칠산, 공주 등을 4개월 동안 순회한 후 12월에는 강경침례교회에서 사경회를 열어 복음 전파사역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펜윅의 선교 열정으로 이 지역 교회들과 완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