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한이 제시하는 부활현현 이야기에 담긴 부활의 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은 부활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을 전달한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평강을 주시는 것에 관한 두 번째 언급은 제자들의 삶에서 평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 예수의 길을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들로 인한 박해와 고난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평강의 생명이다. 이 평강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요한은 부활현현 이야기들에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것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20:19, 21, 26; cf. 눅 24:36).
부활현현 이야기의 중심적인 내용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는 것과 함께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일을 계승하고 재현하는 사명을 위임하는 것에 있다. 사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제자들이 주 예수의 현현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받는 위임의 말씀을 전달한다(막 16:15; 마 28:19f.; 눅 24:47). 요한은 ‘보낸다’는 동사의 강조적 사용을 통하여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인 것을 강조한다.
예수의 공생애가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사명자의 삶이었다는 것은 요한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한결같이 부각된 주제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사신 것과 같이, 그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의 사명을 계승하고 재현하는 일군들로 임명한다.
요한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내보내는 목적에 관하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비록 여기서 그 목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를 전체를 통하여 분명하게 제시됐다. 그 중에서도 예수는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목자와 양의 관계에 관한 비유적 교훈에서 명백하게 제시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b).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그의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그것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려는 것과 같이, 그가 제자들을 보내시는 목적도 그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먼저 주 예수의 생명을 받아 누리는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나아가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0:22). “숨을 내쉰다”는 단어는 요한복음서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이 첫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는 장면의 재현이다(창 2:7).
예수의 이 행동이 인간 창조와 연관된 것은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의 말씀이 현재 시제로 된 반면에, 이 동사는 창세기 2:7의 70인경을 따라 부정과거 시제로 표현된 것에서도 나타난다.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받으라’는 동사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제자들이 올리어지신 주 예수로부터 보혜사 성령을 받기 시작한 것을 가리킨다.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예고됐다(7:39; 16:7).
이 장면은 바로 이 약속의 성취로 주어지는 성령의 강림을 가리킨다.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시는 하나님이며(14:17), 또 영광을 받으신 주 예수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올리어지신 주 예수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라는 자신의 생명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주님과 연합하며 그의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14:19).
주 예수의 올리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보혜사를 가리키기 위하여 “거룩한 영” 곧 ‘성령’이라는 표현도 이 복음서에서는 특별하다. ‘거룩하다’라는 형용사가 사용된 경우는 전통적 언어와 관련된 곳에서만 나온다(1:33; 14:26). 성령의 종말론적 부어주심은 죄사함의 사상과도 연결됐다(겔 36:25~27). 여기서 특별히 사용된 ‘거룩하다’는 형용사가 이것을 가리킬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침례는 성령을 받는 통로였으며 성령에 의한 침례는 죄들의 사함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포함했다(고전 6;11; 행 2:38; 딛 3:5; 벧전 1:23; 2:1f.; 요 3:5). 요한은, 초대교회의 이러한 사상을 따라, 처음부터 예수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침례요한의 언급을 전달한다(1:33). 제자들은 여기서 성령에 의한 침례를 받으며 동시에 죄들을 사하는 권위를 받는다.
여기서 요한이 묘사하는 성령 강림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전자는 안식 후 첫 날에 이루어진 것이며 후자는 오순절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둘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있으며 또 둘 사이를 연결시켜 여기서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만 하셨고 실제의 성령 강림은 오순절(행 2장)에 이뤄졌다는 견해도 있다.
성령에 관한 요한과 누가의 신학적 강조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둘 사이를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요한과 누가 각각의 신학적인 관점과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은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의 현현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영광을 받으신 결과로 주어진 것이며 그래서 약속된 성령을 이 때 받은 것으로 제시한다.
요한에 따르면,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주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현하셨을 때와는 다르게, 아들이 아버지께로 올라감이 완결됐고 삼위일체의 존재가 되셨으며 그래서 제자들에게 현현하시어 약속하신 성령을 그 자리에서 주신 것을 나타낸다. 누가는 주 예수의 현현 사건을 부활하셨지만 승천하기 전에 이루어진 사건들로 나타내며 그 현현의 목적도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게 하며 앞으로 예수의 승천 후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강림과 새 시대의 도래를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누가도 성령의 강림을 예수의 승천이 이루어진 후에 곧 부활의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올리어지심이 완결된 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는 요한과 누가의 신학적 관점이 동일하다. 다만 예수의 현현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누가가 승천 이전에 현현하신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 반면, 요한은 승천하신 이후에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부활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수여하시면서 죄들을 사하는 사역을 위임한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0:23). 이 말씀은 공관복음서 전승과 강한 연결성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서에는 지금까지 죄사함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cf. 요일 1:9; 2:12). ‘죄들’이라는 복수형 단어도 요한복음서에서 불신의 유대인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두 번 나오지만(8:24; 9:34), 요한일서에서는 여러 차례 사용된다(1:9; 2:2, 12; 3:5; 4:10).
특히 주목할 점은 죄들을 사하는 것과 그대로 두는 것의 이중적 가능성이 함께 제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말씀은 “매고 푸는 것”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의 관련성에 기초하여 논의되기도 했다(마 18:18; cf. 16:19). 마태복음서에서 그 말씀은 교회의 치리권에 관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공동체 내부의 죄 문제를 다루는 말씀이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마태와 같은 맥락에서, 신앙공동체 내부의 죄들을 사하는 문제에 역점을 둔다(요일 1:8~10).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감당해야할 복음전파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비록 요한은 깨끗하게 되는 것에 관한 예수의 교훈을 매우 드물게 다루지만(13:10; 15:3),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제공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알고 있다(8:24, 34ff.). 그는 또 하나님의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구원의 강물이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하여 흐르고 있는 것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죄를 사하는 것은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께서 제공하는 구원을 수여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사하여지다’와 “그대로 있다”가 이 복음서의 가장 좋은 사본들에서는 완료시제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반영한다.
여기서 또 주목할 것은 죄를 사하는 권위가 열두 사도들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죄사함의 권위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오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표현된다.
예수는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죄사함을 선언하고 “우리는 본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너희 죄가 여전히 있다”라고 선언한다(9:41). 예수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죄들 안에 있다. 성령은 죄를 사하기도 하시고 그대로 두기도 하시는 예수의 일을 계승한다. 이렇게 죄들을 사하는 것과 그대로 두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감당해야 하는 핵심적 사명이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