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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음악으로 풀어보는 성경이야기(259)

아비나답의 노래(2)

블레셋으로부터 법궤를 돌려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자신들의 마을로 들어온 것을 복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저들의 영적 무지로 인해서 그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사실 기회를 날린 정도가 아니다. 법궤를 구경하다가 무려 50,070명이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레위인이 함께 있었지만 그 역시 영적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정확한 제사법조차 몰랐으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경내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치워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 중에서 법궤를 모실 수 있는 다른 레위인을 찾았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벧세메스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레위인의 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벧세메스로부터 14.5km 떨어진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이었다. 그러나 법궤로 인한 비극은 계속 되었다.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70년이나 머물렀지만, 그 역시 그의 아들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웃사가 다윗성으로 법궤를 이송하는 도중 급사한 이유를 대부분이 레위인이 꿸 채로 어깨에 메지 않고 소달구지를 이용했다는 것에서 찾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무엘상7:2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알 수 있다. 사무엘상7:2에는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하는 애매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한 절에 묶여 있어서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비나답이 20년간 법궤를 잘 모셨으므로, 그로 인하여 히브리백성들의 회개운동이 촉발됐다고 해석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20년간 머물렀던 것과 미스바대성회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주장 중에서 우열을 논하려면 먼저 사무엘의 움직임을 관찰해야 한다. 사무엘은 법궤의 영적 가치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법궤가 있었던 실로의 성막으로 그 법궤를 다시 이송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법궤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왜 사무엘은 법궤에 관심이 없었을까? 두 가지 요인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가나안 온 땅을 지배하고 있었던 블레셋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법궤를 모른 척했다는 가설이다.

 

두 번째는, 히브리백성들이 여전히 우상숭배에 만연해 있어서, 법궤 역시 우상처럼 섬길까봐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법궤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가설이다. 두 주장 모두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사무엘이 미스바대성회에서 주제로 내걸었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번째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무엘상7:3에 기록된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는 말씀에 의하면 미스바대성회의 슬로건은 우상타파였다.


오랜 세월 동안 블레셋의 압제의 큰 고난을 겪었던 이유를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긴 종교혼합주의의 죄에서 찾았고, 나아가 블레셋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스다롯을 비롯한 모든 우상숭배를 중단하고 우상들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 사무엘의 설교의 핵심이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사무엘상7:2은 법궤가 20년간이나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는 동안, 법궤와 상관없이 사무엘의 열정과 노력으로 히브리백성들 속에 갈급한 회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안치된 것은 아비나답의 법궤에 대한 사랑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는 수 없이 법궤를 관리해야 했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아비나답은 자신의 아들 엘리아살을 시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법궤에 대한 열정 없이 그저 의무적으로 법궤를 관리했고, 나중에는 방치의 오랜 세월 동안 교회에 다녔다고 자랑할 것 없다. 높은 직분 받았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경배와 찬양이 없다면 외적인 형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비나답이 70년간이나 법궤를 모신 결과가 자신의 아들 웃사의 죽음이었다는 것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노주하 목사 / 대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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