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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교회


신학교(Seminary)는 라틴어의 못자리’(Seminarium)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신학교는 성직을희망하는 자에게 필요한 신학(theology)을 가르치는 기관이다.


목회자가 되려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한다. 신학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학 이론이다. 신학이론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학설로 펼친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신학이론이 성경적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때에 신학자들은 자신들만의 학문의 색깔이 있고 신앙관이 있다.


그래서 급진적인 좌파신학이 있는 반면에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신학도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학설만이 정통적인 성경관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칼날을 세우기 때문에 분별해낼 능력이 없는 공부하는 학생들은 정신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뜨겁던 열정적인 신학이 점차 식어지고 태만해지며 부정적인 시야로 변하게 되는 신학생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교와는 달리, 교회(Church)는 신학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신앙(Belief)을 배워 삶에 적용하는 곳이다. 신앙은 학문이 아니라 체계적인 믿음이다. 물론 그 믿음은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분별의 사명은 목회자에게 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여 대학원까지 마치고 석사, 박사학위를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양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교회에 돌아가 성경적인 신앙을 가르쳐, 양들을 잘 양육하여 천국백성으로 구원의 문으로 데리고 가는 책임을 목회자는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칫 어떤 교회에는 여러 신학자의 주장을 설명하며 다양한 신학이론을 소개하며 스스로 자기학문이나 지식을 뽐내는 현학적(衒學的) 설교가 명설교인 것처럼 착각하는 곳도 있고 어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유명한 신학자가 주장한 이론을 나열하는 곳도 있다.


이렇게 교회가 되어버린 이유는 악한 영들이 신학자와 목사 등의 교회지도자의 머리를 지배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넣어주고 목회는 약화되고 그 본질을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태도도 문제가 된다. 목사들을 청빙할 때 건강한 신앙관을 보기보다는, 어디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설교를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하는 지를 보고 받아들였기에 이 같은 폐단을 낳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 구덩이에 빠지는 위기를 당하게 된다. 이처럼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에 있다면 그 또한 큰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탓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복음에 충실하지 않고, 적당히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교회에서 목회한다면 결코 영광스런 천국의 백성으로 설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을 기르기보다 신학을 가르치는 교회의 잘못에 대해 꼬집어보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의 핵심은 구원관(救援觀)이다. 그러므로 구원관이 잘못되었다면 교회의 설립자체가 무의미하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천국이 좁은 문이며 이 길을 가는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수는 좁은 길을 가는 것처럼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떤 이는 예정론을 앞세우며, 예수를 영접하며 입으로 시인하고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학설을 주장했다. 오늘날 어떤 교단에서는 교회에서 이런 영향을 받아,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상한 신학이론이 있다. 그래서 그런 목사가 얘기하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잘못을 또한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바른 구원관을 심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수를 영접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성령이 안에 계신다는 말씀을 확대해석하여, 성령이 자신 안에 계시다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와 다르게 말씀을 하신 곳이 많다. 성령의 활동을 소멸하지 않게 쉬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또한 성령의 능력은 바로 기적과 역사를 일으키는 기도의 능력에 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이미 2세기경에 끝났다는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말보다 더 떠받들고, 자신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없음을 변명하고 미화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끝날 때까지 성경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가? 성령의 능력이 단지 성경의 일화로 소개하는 오늘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신학자들의 말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이런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신학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곳이다. 믿음은 신학자가 소개하는 학문을 배운다고 견고하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는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과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영적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그러나 자칫 어떤 이들은 성경을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소개하는 설교시간이 중심이 된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하면 믿음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쉬지 않는 기도의 습관을 가르치기보다는 형식적인 기도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도목록을 외치기만 하면 기도를 잘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고 교회의 직분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인조차도 시간이 지날수록 영혼이 피폐해지고 삶에 힘이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신학은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여러 학문을 배우고 소화를 해서, 그리고 교회로 와서 목회 할 때는 양들에게 성경적인 신앙관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도 신학을 가르치고 소개하는 행위는 교회를 마치 신학교로 착각하는 것이다. 신학교의 신학이론을 충분하게 소화하지 못하며 성경적인 신앙관을 분별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교회지도자가 아니라 신학지식을 전달하고 자랑하는 종교적 직업인일 뿐이다.


교회에서는 신학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을 양육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신학자의 이론은 중요시하며 전파하는 그런 교회의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설교시간은 세상의 지식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성경적 동기부여를 시키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 쉬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습관을 길들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적이고 세상풍조를 전하는 설교의 허상에 빠진 목회자들과 귀만 즐겁게 하는 달콤한 말의 예배시간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양들이, 서로의 호흡이 맞아 같은 취향을 맞추었기에 교회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이 험난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가 없는 것이다


 성경적인 신앙관을 가르치며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시키지 않고, 다만 신학자의 주장을 세뇌시키는 교회에 있다면 그 공동체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명을 다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 성도들은, 또한 교회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른신학, 바른신앙, 바른 교회의 모습을 이루도록 혼신의 영적 경주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이러한 목회적 지혜를 주옵소서!


고흥식 목사 / 영통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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