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교학 이후에 나타난 현대설교의 동향과 과제-6
(A Study of the Trends and the Tasks of Contemporary Preaching After the New Homiletics )
현대 설교자들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했던 성서시대 사도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짐 쉐딕스(Jim Shaddixc)에 의하면, 기독교회의 설교는 초대교회 시절에서부터 언제나 강해설교를 근간으로 하였다. 구약의 회당예배에서 율법서를 읽었던 전통은 초대교회에 들어서 구약성경에 대한 낭독과 사도들의 편지를 읽고 강해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 시기의 교회들은 본문 중심의 설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설교는 처음부터 강해설교로서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훈은 반드시 읽혀진 본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다.”
오늘 하나님의 인간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현대 설교자는 성서의 권위를 내려놓거나 말씀 선포자로서의 권위를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지난 세기 척박한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훗날 이 땅에 침례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펜윅과 당시 대한기독교회(동아기독교) 지도자들은 불변의 권위인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북방선교의 최전선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던 대한기독교회의 주역들과 그들의 후예인 이 시대의 침례교 설교자는 어떤 이유, 어떤 시대적 변화 앞에서라도 성경의 권위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나아가, 성서를 불변의 권위로서 지키고 따라야 할 이 시대의 교회들이 말씀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확신과 함께 설교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한 이 땅의 기독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말 것이다.
III. 현대설교의 과제
신설교학적 노력은 설교의 관점을 지나치게 청중의 삶에 치중함으로써 설교가 본질적으로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겼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점에서 현대설교의 과제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설교가 직면한 두 가지 문제와 연관된다. 그중 하나는 설교가 인본주의로 흘러갔다는 지적이며, 다른 하나는 “구태의연한 전달방법을 고수”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현대설교가 직면한 과제는 첫째, 성서적 설교의 회복이며 둘째는, 포스트모던 문화에 젖어있는 현대 청중에게 다가서기 위한 전달 방법의 개발이다.
1. 성서적 설교의 회복
현대설교가 성서적 설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설교의 신학적 본질과 설교자의 정체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설교에서 수사기법은 전달을 용이하게 해주지만 그것이 결코 전달해야 할 성서적 내용을 앞설 수가 없고, 화려한 수사적 표현을 앞세운 메시지라 할지라도 그 내용의 진실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현대설교는 이제 다시금 청중과의 보다 나은 소통을 위하여 소외시켰던 신학, 곧 메시지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다시금 설교의 핵심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즉 신설교학의 한계를 직시하고 다시금 수사학에 내어준 본래의 자리에 신학을 회복시킴으로서 말씀의 진정성을 견고히 세우자는 것이다.
성서적 설교를 강조하는 학자들은 최근 “강해설교”라는 용어 대신 성서적 설교 혹은 “본문이 이끄는 설교”(Text-Driven Preaching)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는 “본문은 왕이다”라는 전통적 강해설교의 철학을 확고히 하면서 주어진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밝혀내는 것을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다. 최근 미국 남침례교 설교학자들은 성경의 문학 장르에 따른 본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구체적으로 설교자가 3S[내용(Substance), 구조(Structure), 적용(Spirit)]을 성경 본문에서 도출해 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시, 율법, 비유, 이야기 등의 다양한 문학 형식을 통해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이용하여 말씀을 계시하셨다면 본문 해석자로서 설교자는 반드시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의 부활이후 십 수세기 동안의 전근대기가 있었던 반면에 근대기는 수백 년에 불과했던 것처럼 후기근대기, 곧 포스트모던은 머지않아 다가올 세대에 그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청중 중심의 설교는 또 다른 유행의 물결을 타고 온 세력으로 대체될 것이다. 크레이그 로스칼조(Craig A. Loscalzo)는 그의 책 「변증적 설교」(Apologetic Preaching)에서 포스트모던 세상 속에서도 설교는 얼마든지 복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밝히는 것이 설교라고 한다면, 성경 본문 중심의 성서적 설교가 아닌 모든 형식의 설교는 그 철학과 함께 소멸될 것이다.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와 문화권을 초월하여 불변하시는 우주적 말씀이라면 비록 설교의 전달 방식은 각 시대에 걸맞는 옷으로 갈아입듯이 변화가 불가피하겠으나, 성서적 메시지로서의 본질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2. 효과적 전달을 위한 방법론 개발
설교에서 전달 방식의 개발이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명백하다. 설교는 내용(what)과 전달 방식(how) 두 개의 기둥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집이기 때문이다. 좋은 전달 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진리의 내용을 보다 더 청중의 가슴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즉 설교에서 전달형식은 내용에 우선할 수 없으나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한국 교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성에서 벗어났다는 지적은 설교의 본질에 더 충실하여야 한다는 설교자적 자각을 추궁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것은 이미 한국교회에 던져진 큰 도전이 되었다. 이것이 설교자가 치열하게 싸워 이기고 지켜내야 할 싸움이라면, 이 싸움에서 설교의 전달 방식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왜냐하면 설교는 청중에게 전달됨으로써 완성되는 말씀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설교 학자들은 설교를 지칭할 때, 예술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는 설교가 구태의연한 전달 방식을 탈피하여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전달 방식을 필요로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굳이 그러한 필요성을 ‘예술’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만큼 전달 방식의 영역은 설교자의 예술적인 감각이 내포된 다양한 형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성서적 설교를 위한 효율적인 방법론은 설교학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다. 다음은 몇 가지 방법론의 제안이다.
1) 연역법과 귀납법
크레독은 전통설교가 가지고 있는 연역적인 논증방식은 설교자가 자신이 정한 설교적 명제에 입각하여 청중의 삶에 그것을 적용시키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설교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레독의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는 3개요로 구성된 전통설교 방식을 연역적인 방식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전통설교 논증방식이 전적으로 연역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크레독은 강해설교의 방식이 전통적 3개요 설교라는 기본 이해를 가지고 강해설교를 거부하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 강해설교는 주어진 하나의 설교 본문에 대한 주해를 바탕으로 파악된 계시의 말씀을 연역적 또는 귀납적으로 조직하여 그것을 청중에게 적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어떤 고정된 틀이나 고착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포스트모더니티의 청중에게 거부감을 준다면, 현대 설교자는 전달 방식을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다.
문상기 교수
침신대 신학과(실천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