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담긴 신학 산책
요한복음에서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학(12)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세 번째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주 예수의 세 번째 현현 사건이 단순히 물고기(생선)를 잡는 사건이 아니라, 주 예수의 선교 위임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러 나간 선교 현장에서 갖게 된 체험을 나타낸다는 것은 지난 호에서 다루었다. 제자들은 주 예수의 선교 위임에 따라 담대히 선교의 현장에 나가 수고했지만, 주 예수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제자들의 실패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을 알린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21:4). “이른 아침이 되어갈 때에”라는 언급은 밤의 어두운 혼돈의 물결로부터 낮의 빛이 임하는 새로움의 시작을 알린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이었던 것과 같이,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열매가 없는 허탈한 제자들에게 밤이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주 예수의 현현은 이번에는 “바닷가에 서셨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때의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예수의 공생애 시절에 그가 풍랑이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심을 통하여 그의 신적 존재성을 나타내셨던 것과는 달리(6:19), 이번에는 바닷가에 서심을 통하여 그의 공생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때에도 제자들은 예수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했었다.
이번에도 그들은 주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자는 ‘참으로’라는 부사어를 사용하여 그들이 알지 못하는 상태를 강조한다.
주 예수의 현현이 이어지는 현재 문맥에서 두 번에 걸친 예루살렘 현현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여기서 제자들의 무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제자들이 주 예수의 현현을 두 번이나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굳건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를 반영한다. “날이 새어갈 때에”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신앙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세 번째 현현의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사건이 예수의 세 번째 현현이라는 것을 특별히 부각시킨다(21:14).
저자는 주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전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21:5). 주 예수께서 여기서 제자들을 향하여 사용한 호칭(예들아)은 요한복음서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이 복음서에서 저자가 제자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더 선호하는 단어는 ‘자녀들’이다. 이 단어는 왕의 신하의 아들(4:49)과 해산하는 여자가 낳은 갓난아이(16:21)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요한일서에서 그것은 저자의 독자들인 신앙공동체의 회원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다(요일 2:14, 18). 자녀와 아이는 기본적 의미가 다르다: 아이가 미성숙한 혹은 덜 발달한 나이를 가리키는 반면, 자녀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로 사용된다(1:12; 8:39; 11:52). 여기서 주 예수는 현재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들이 아니라 주 예수의 진리에 관하여 아직은 충분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로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비판적 호칭이 아니라, 그들이 더 성장할 수 있는 소망을 갖고 부르는 애정 어린 호칭이다.
“너희에게 물고기가 없지 않느냐?”라는 질문은 부정적 상황에 기초하여 부정적 대답을 기대한다. 주 예수는 그들의 상황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래서 제자들은 ‘없다’라고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대답한다. 여기서 물고기로 번역된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그것은 원래 빵과 함께 먹는 양념을 의미하지만, 보통은 단순히 물고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래 일반적인 물고기(생선)를 의미하는 단어는 21:9, 10, 13에 나온다. 누가도 현현하신 예수의 말씀 중에서 먹는 것과 관계된 것을 전달한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눅 24:41). 주 예수는 이번에는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던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들은 해변가의 낯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지만, 그들의 실망스러운 상황을 기꺼이 그와 함께 나눈다.
주 예수는 제자들의 실망스러운 상황을 반전시켜 주신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21:6). 이 구절은 전형적인 기적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된다: 기적 이행자의 말씀과 그 말씀의 이행 그리고 기적이 나타나는 효과. ‘오른편’이라는 구체적 설명은 오른편에 대한 성서의 긍정적 평가를 반영한다. 하나님은 그의 오른 손으로 활동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오른편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상징한다: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1). 주 예수의 말씀은 명령과 약속의 형태로 제시된다: “오른편에 던져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계신 곳에 관한 첫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은 형태의 말씀이다: “오라 그리하면 볼 것이다”(1:39). 예수의 명령은 축복의 약속을 포함한다. 제자들이 그것을 순종하면 말씀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누가 이야기에는 고기를 잡은 정도가 다르게 묘사된다: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에 채우며 잠기게 되었다(눅 5:6~7). “그물을 들 수 없었다”라는 말에서 ‘든다’는 단어는 이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이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을 예수에게 이끄는 힘이 있으신 분은 예수 자신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다(6:44; 12:32). 그러나 예수께서 올리어지신 후에는 주 예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에 의하여 그 일이 계승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이며 제자직의 이 국면을 수행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이 주 예수의 도움을 받을 때, 그들에게는 사도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고 그래서 그들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물고기’로 사용된 단어는 최초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상징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각 철자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헬라어 단어들의 첫 자로 구성된다. 그래서 “물고기가 많아”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사도적 복음전파 사역의 놀라운 결과를 예고한다.
저자는 기적을 체험한 두 제자의 반응을 묘사한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21:7).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무덤에 달려가 확인한 이후에 처음으로 두 제자가 함께 등장한다.
저자는 앞에서 언급된 다른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신원을 “예수가 사랑하신 그 제자”로 밝힌다. 그 제자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첫 번째의 사람이었던 것과 같이(20:8), 여기서도 주 예수의 현현을 인식한 첫 번째 사람으로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고백은, 도마의 고백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20:28), 부활의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최고의 기독론적 신앙고백이다. 엠마오 이야기에서 누가는 예수께서 떡을 떼시는 가운데서 두 제자에게 알려지셨다고 말한다(눅 24:35). 그러나 여기서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는 가운데서 예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이미 그들의 모임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부활의 예수를 발견한 상황에서(20:19, 26), 그들은 이제 물고기를 잡는 일로 상징되는 것으로서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는 현장에서 그들과 동행하시며 도와주시는 주 예수를 발견한 것이다. 닫힌 문들 밖에 있는 인생의 어두움과 불안 속에서도 주 예수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사역의 현장에 함께 계셨다.
“그는 주님이다”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의 행동은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물고기를 잡는 상황에서는 겉옷을 입고 있다가도 벗은 후에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반대로 행동했다. 그런 그의 행동은 예수의 공생애 시절에 보여준 그의 충동적인 행동에 걸 맞는다(cf. 13:8; 막 8:32; 9:5~6). 그는 아마 겉옷을 벗고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cf. 13:4). 그가 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든 것은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베드로는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그가 주님이시다”라는 그 사랑 받은 제자의 말을 들은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고 반응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그 사랑 받은 제자 다음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예수에게 첫 번째로 나아가기를 시도한다. 마치 그 사랑 받은 제자가 무덤에 먼저 갔지만 그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간 사람은 베드로였던 것과 같이, 주님의 임재를 알아보는 일에 있어서는 그 사랑 받은 제자가 앞섰지만 그 주님 앞에 먼저 나간 사람은 베드로였다.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