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참들이 먼저 품삯을 받다니?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시간 일한 자에게도, 12시간이상 일한 자들에게도 품삯은 동일했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더 고생한 고참들은 더 많은 품삯을 기대했으나 저들의 꿈과 기대는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분노가 치민 고참들은 주인에게 대들었고, 주인도 한 발 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인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는 역설적인 단호한 말로 결말을 지어 버렸다. 일찍 들어온 일꾼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에 대한 열심이 감소하게 되어 건성으로 일을 마치게 된 것과는 달리, 늦게 들어온 일꾼들은 미안한 마음에 정말 열심히 일했을 것이며, 일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에서 일을 마치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주인은 작업량보다는 일꾼들의 뜨거운 마음을 더 원했던 것 같다.
설교는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기도도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회중찬송가의 무한 반복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어떤 교인은 평생 똑같은 찬송가만 부르고, 회중 전체가 찬양할 때도 그 찬송가만을 부르기를 원한다.
어떤 목회자도 자신이 익숙한 찬송가만 주보에 올린다. 그러다 보니 죽을 때까지 주보에 올리는 찬송가가 회중찬송가 500여곡 중에서 30곡도 채 되지 않는다. 본인들은 편하지만 뜨거운 마음도 없이 매일 습관적으로 불려지는 뻔한 찬송가에 하나님은 불편해 하신다.
모 지방회는 경건회를 마칠 때 마다 그 많은 찬송가 다 버려두고 372장 “나 맡은 본분”만 부른다. 회의 참석한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찬송가를 부르는지 별로 의식도 없다. 성경말씀도 프로젝트에서 친절하게 다 쏘아주니 성경 찬송가를 지참할 필요도 없다.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쉽게 익힐 수 있는 보석과 같은 새로운 찬송가들이 주위에 널려있건만, 찬송가 익히는 데 투자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깝게 여기는 것 같다. 편한 게 좋다는 식으로 새로운 찬송가를 익히기 위한 훈련과 집중력을 피하려고 한다.
자신이 모르는 찬송가나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 찬송가가 순서에 포함되면, 배우려는 마음을 갖기보다는 미리 포기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찬양시간에 딴 짓 한다. 찬송가와 음악신학에 대한 기초가 없다보니 요즘 찬양에 갈급해 하는 젊은 세대들이 어떠한 찬송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찬송가들을 주로 부르는 지에 대한 감각도 없다.
찬송가에 대한 세대차이가 크면 클수록 교회 내에서의 세대차이도 커진다. 세대 차이는 곧 세대의 단절을 의미한다. 세대의 단절은 곧 유럽 교회의 쇠퇴를 답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찬송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보통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나이가 많은 교인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기존 찬송집을 성경의 권위로 오해하는 생각이 고루한 교인들이며, 세 번째 부류는 낯선 것을 싫어하는 ‘귀차니즘’환자들이다. 눈치 빠른 목회자들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의도적으로 오래 된 찬송가만을 애용한다.
이러한 교회는 10~20년 뒤 교회가 비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물론 교인의 대부분이 천국가기 직전인 경우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전술한 두 번째, 세 번째 이유로 인해서 새로운 스타일의 새로운 찬송가를 터부시한다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 물론 어려운 리듬의 적응하기 어려운 난해한 찬송가만 소개하는 찬양인도자도 문제이지만, 현대적인 감각의 새로운 스타일의 찬송가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새로운 찬송가를 거부하는 행위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익숙한 찬송가만이 은혜가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찬송가의 목적이 개인이 은혜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찬양의 목적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하나님 영광’이다. 찬송을 부르는 자가 은혜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찬송가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찬양자의 뜨거운 마음이 담긴 ‘새 노래’를 기뻐하신다(시편96:1, 시편33:3, 시편144:9, 시편149:1, 시편40:3, 시편98:1, 이사야42:10, 계시록5:9, 계시록14:3). 새로운 찬송가를 부를 때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집중력과 에너지가 소요되므로, 찬양자는 노래에 더 몰입하게 되고, 조금씩 익숙해지는 과정 속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오벧에돔은 3개월동안 뜨거운 마음을 담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모셨다. 새 노래에 담겨지는 감사와 찬양의 뜨거운 마음과 주님께 헌신할 때에 일어나는 감사와 찬양의 뜨거운 마음은 서로 통한다.
노주하 목사 / 대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