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외동아드님이 자기집 머슴군에게 절절매는 꼴을 보노라면 그 아비는 분통이 터질 것 아닐까.
주인이 종에게 기가 죽어 있는 처량한 모습은 가관이 아닐까.
발전된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甲乙관계가 아닌 甲甲관계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최근 사조인 것 같은 데 즉 노사평등관계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직하게 따져볼 때 甲乙관계는 무엇인가? 甲은 上位者요 乙은 하위자라는 것이다. 甲은 시키는 사람이고 乙은 시킴을 받는 사람이다. 乙의 운명은 甲에게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전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라 하더라도 고용주와 피고용자는 있게 마련이고, 고용주는 甲이 되고 피고용자는 乙이 되게 되어있다.
교회와 세상은 어떤 관계란 말인가? 교회는 甲이고 세상은 乙이라는 것이 그리스인의 신앙고백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甲이라고 믿고 세상은 乙이라고 본다. 世上은 교회덕분에 먹고산다는 논리다. 교회가 먼저이고 세상은 그 나중이다. 이거 무슨 말인고!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자기표현이며 자기개방이고 자기백성의 모임인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보존하셨고 완전케 하고 계신다. 그리고 교회보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일찍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그런데 오늘 날 교회와 세상을 보노라면 하나님이 정하신 甲敎會 乙世上이란 체계가 깨어졌음을 본다. 거꾸로 甲世上 乙敎會가 되어 버렸다. 교회가 세상 밑에서 구걸하고 세상 눈치를 살피는 하위 자리로 떨어져 있음을 본다. 딱한 일인지고.
고린도교회가 그러했다. 고린도교회가 甲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교회내의 분쟁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법정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사도바울은 경고를 내렸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6:1-3)
성도에겐 세상과 천사를 재판할 권리와 명예가 주어져 있었건만 이 권리와 명예를 스스로 포기하고 세상에게 양도해 버렸던 것이었다.
우리하늘 아버지께서 世上을 다 만드시고 성도보고 관리하라고 했건만 우리는 세상의 관리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세상의 주인이 되라고 하셨건만 우리는 세상의 종이 되고 있지 않은가?
성도는 세상 앞에서 당당하라. 위축되지 말라. 세상에게 뭣을 달라하지 말라. 성도가 그 반대로 하라. 세상을 향해 가슴을 펴고 크게 외치라. 우리를 바라보라. 우리 덕에 그대들이 사는 거라고 외치라. 성도가 세상을 향해 고쳐주고 살려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노라고 할지어다. 오늘 날 교회성도가 앉은뱅이 세상을 향해 베드로의 고백 같은 함성을 발해야 하지 않겠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3:6)
세상이 교회를 향해 걸으라 하지 말고 교회가 세상을 행해 걸으라고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