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으로 인해 유럽 땅에서 잃어버린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해외를 향해 선교의 눈을 떴다.
16세기 중반 로마가톨릭 교회와 교황청은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일환으로 해외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전통적인 로마가톨릭 선교단체였던 프란시스칸 수도회(Franciscan Order)와 도미니칸 수도회(Dominican Order), 그리고 종교개혁기에 새로 생긴 예수회(Jesuits, Society of Jesus) 등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교황청에 충성하였다.
그들은 무장을 한 정복자들(Conquistadores)과 함께 수도사 선교사들(Missionaries)을 파송하여 식민지 확보를 도모했을뿐 아니라 유럽 밖의 세계를 로마가톨릭화 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대형범선들을 소유하며 운행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같은 해양강국들이 급부상하여 교황청의 해외선교를 위한 동반자들이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교황청의 후원을 힘입어서 로마가톨릭 국가들에 의한 제국주의적 선교(Imperialistic Mission)가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유럽 내에서의 영향력 확보에 집중하였고, 그리고 각 개신교 교파들은 자신들의 개혁적인 신앙과 교리들을 체계화하고 신학화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를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당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과 그 후계자들은 유럽 밖의 세계를 향한 선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여력이 거의 없었다.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에서도 해외선교를 위한 노력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지 간헐적으로만 이루어졌다.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필립 스페너(Philip Spener, 1635~1705)와 아우구스트 프랑케(August Francke, 1663~1727) 등이 할레대학교를 중심으로 그린랜드(Greenland)의 에스키모인들과 캐리비안 해역의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였고, 진젠도르프 백작(Count Nicolaus L. Zinzendorf, 1700-1760)과 모라비아 교회에 의한 선교의 노력이 있었지만, 후대의 전세계적인 선교운동과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세계선교를 본격적으로 감행했던 것은 “근대선교운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윌리암 캐리의 인도 선교사역부터였다. 그에 의해 1792년에 「질문서」(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라는 일종의 선교지침서가 출간되었고, 같은 해 가을에는 최초의 해외선교단체인 “침례교선교협회”(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었다.
이듬해인 1793년에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인도를 향해 출발하여 캘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부터,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많은 해외선교단체들이 결성되었다. 그래서 19세기가 “개신교 세계선교의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 of Protestant World Mission)가 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과 그 후계자들은 16세기 당시의 로마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과 비교해 볼 때, 유럽 밖의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위한 선교에는 별로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섯째로,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두 의식들(Two Ordinances: Baptism과 Lord’s Supper)에 대해서 로마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 전통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믿었고 그에 따라 미사를 드렸다. 화체설은 일찍이 코르비(Corbi) 수도원 원장인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 c.785~860)가 자신의 저술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하여」(On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 831)에서 주장했었던 내용인데,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61-1216)가 주재했던 “제4차 라테란공의회”(1215)에서 로마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로 채택되었고 “트렌트공의회”(1545-1563)에서 재확인되었다.
이 교리는 예배 시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가 성직자의 축복기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실제로” 변한다는 주장이었다. 무지몽매한 평신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떡은 십자가 상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로 변하고 포도주는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변해서, 그것들을 먹고 마시면 영의 양식을 공급받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례 그 자체에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이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 교리는 성직계급제도와 함께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의 권위를 드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계속>
김승진 교수
침신대 역사신학(교회사)
신학연구소소장
예사교회협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