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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길로 이끌어 가는 빛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요 요한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사도 요한은 그분을 가리켜 중에서도 참 빛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생명은 표현만 달리할 뿐 본질 면에서 보면 같은 것들이다. 모두가 사람들에게 생명을, 그것도 유한하지 않고 무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들이다.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됐건, 아니면 물리적인 것이 됐건 참으로 좋은 것이다. 예수가 없다면 인간에게 영생은 없을 것이고, 물리적인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됐을까? 물리적인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있어 빛이 있고, 빛이 있어 이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의 덕분이다. 빛이 없어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모든 사물은 평면으로 보일 것이다. 사물이 입체적으로 보인 것은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햇빛이 좋은 날은 사물이 입체적으로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그러기에 그런 날이면 필자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일이 많다. 날씨가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윤곽이 또렷한 사진을 선호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햇빛이 쨍쨍한 날 찍은 사진은 그림자 진 부분이 아예 까맣게 나오기도 한다. 성격 탓인지 모르지만 필자는 그런 사진을 좋아한다. 꽃도 그런 날이 아니면 거의 찍지 않는다.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면 햇빛의 반사 때문에 꽃 같은 사물의 색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꽃의 아름다운 색을 살려 찍으려면 구름이 적당히 낀 날이 좋다. 아니면 그늘이 좋다. 그럼에도 필자는 꽃도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찍기를 좋아한다. 아름다운 색이 아니라 그 꽃이 품고 있는 무엇인가의, 남들이 보지 못하는 형상을 담아냄으로써 그 형상에 내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해 보고자 해서이다.

 

그러니 사진을 찍을 때의 필자에게 있어서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어 참으로 고마운 존재이다. 사진에서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있으나 마나이다. 빛 가운데의 물체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기에 필자는 날씨 좋은 날을 사진 찍는 날로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가 진 곳은 그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또 그늘 진 곳은 음지라고도 하는데, 그늘도 그렇지만 음지라고 하면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음지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나 어려운 형편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 쓰기도 한다.

 

음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는데,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고 하는 안기부 시절의 국정원의 부훈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음지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 된다. 안기부 시절의 국정원이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 그 자체로만 본다면 이보다 더 좋은 말도 없을 것이다. 이는 크리스천들의 생활신조로 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손색이 아니라 최상의 것이 될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라고 하는 찬송가의 가사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축구 같은 스포츠에서 말하는 어시스트와도 비슷할 것 같다.

 

그늘은 음지의 동의어에 가까운 유의어이지만, 전자가 후자보다는 덜 부정적인 느낌인 것 같다. 그늘은 근심이나 불행으로 어두워진 마음이나 표정을 가리키기도 하고 불우하거나 부정적인 환경, 또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하는 면에서 보면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의지할 만한 사람의 보호나 혜택을 말할 때도 쓰인다고 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러하다는 말이다. 사실 한여름의 불볕더위 속에서의 그늘은, 타들어가는 갈증을 달래주는 시원한 샘물 못지않게 고마운 것이다.

 

빛은 좋은 것이로되 이처럼 그것을 가려야 할 경우도 없지 않다. 음지식물 같은 것은 그 빛이라는 것을 아예 싫어한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필요하기만 한 빛이다. 그래서 참 빛이다. 그 빛을 받으면 그게 누가 됐건 밝은 사람이 된다. 마음이 밝아져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永生)을 자기 것으로 갖게 된다.

 

영생의 반대 개념은 영멸(永滅)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영멸은 멸망하거나 사라져서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전적 의미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영원히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지옥에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망이라고도 한다. 죄의 삯으로 받아야 하는 사망 말이다.

 

그런데 영멸하는 지옥은 빛에 대한 그늘이나 음지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천국인데, 그 반대편인 그늘이고 음지인 지옥은 사단의 나라라는 말이다. 물리적인 그늘이나 음지에는 긍정적인 면이 적지 않지만 영적인 그것, 그러니까 지옥은 부정적인 것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몹쓸 죄를 지으며, 그 죄 값은 죽어 저세상에 가서 받겠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죄 값이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면 결코 그런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다.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은 아무리 길게 계속된다 해도 몇 십 년에 불과하지만, 죽어 그 죄의 값으로 받아야 할 고통은 영원하다.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이 세상에서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도 그리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끔찍스런 말은 그만하고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영생, 그것은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생의 삶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생에서의 그것은 물론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그럴지라도 정말 좋은 것이다. 어떻게 좋은 것이냐고 한다면 짧은 말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그만두지만, 굳이 한 마디 한다면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영생에 관해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모두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데 무슨 소리냐고 하지 않았으면 한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을 걸고 믿는 그런 믿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은 본래가 그런 것이다. 그렇게 믿을 때 죽으면 산다고 하는 기독교의 역설이 현실로 되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믿느냐고 한다면 필자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으려고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정말로 행복하다.

 

그러고 보면 나이가 많다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젊은 시절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믿게 해 주시라고 기도한 것도 사실이지만, 거기에 들인 노력은 정말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믿음이라는 것이 육신의 생활과 충돌하면 죽으면 죽겠다는 각오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말았다. 젊다 보니 아무래도 앞으로 살날들을 생각하게 되어 욕심을 내려놓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칠순을 넘긴 나이다 보니 살 만큼 살았고 누릴 만큼 누렸으니 하나님께서 지금 데려가신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욕심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덕분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믿어 보자는 마음만은 가질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운신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욕심으로 가득 차 목을 통해 입으로 흘러넘칠 지경이던 욕심을 아주 조금 비워냈을 뿐인데도 몸을 움직이기가 날아갈 듯 편해진 것이다. 욕심을 비워내니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고, 그러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인데도 그분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좋아 행복하다.

 

좀 더 젊었을 때부터 지금만큼 만이라도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제 와서는 쓸데없는 생각이니 앞으로나 더욱 애를 쓰자고 다짐을 해 본다.

 

임종석 목사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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