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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담긴 신학산책

요한복음에서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학(18)

요한복음서에서 부활현현 체험의 마지막 국면은 이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제자로 묘사된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에 관한 주님의 언급으로 진행한다. 저자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 속에 그 제자를 등장시킨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가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이더라”(21:20).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대화 가운데서 그의 동료이며 경쟁 관계에 있던 그 사랑 받은 제자에게 관심을 돌린다. 베드로는 그 제자가 이미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자는 ‘따르다’는 동사를 사용하여 베드로와 그 제자의 상황을 대조시킨다. “그 제자가 따르고 있다”라는 그 제자의 상황에 관한 표현 앞뒤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인 “나를 따르라”(v.19)와 “너는 나를 따르라”(v.22)는 지시가 반복된다. 그 제자는 베드로가 행하도록 반복적으로 지시를 받은 것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을 이미 행하고 있었던 것이 부각된다.


그 제자는 고별 강화에서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과 동일시된다(13:23~25). 그는 예수께서 사랑한 제자이며 그래서 예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던 배반자에 관한 질문을 순수한 마음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외면적으로는 가장 열심히 예수님을 따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결국 크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은 외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그래서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그 십자가 밑에 섬으로써 담대하게 자기의 정체를 드러냈었다. 그는 여러 상황에서 늘 베드로와 함께 등장하면서 항상 베드로를 능가하는 사람으로 제시되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제자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의 삶의 결국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해, 그 제자의 미래에 관하여 물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1:21). 베드로는 목자의 사명과 권위를 위임받았으며 그의 결국에 관한 예고의 말씀도 들었다. 용기를 얻은 그는 경쟁 상대인 그 제자의 결국에 관해서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것은,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람의 장래까지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의 발로일 수 있으며 경쟁심의 결과일 수 있다. 사람이 주님께로부터 목자의 권위를 위임받고 또 자기의 미래까지도 아는 영적 은사를 받는다면, 다른 사람의 미래까지도 알려고 하는 영적 호기심과 교만에 빠지기 쉽다. 이 말씀을 초대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목자요 순교자인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적 교회들과 그 사랑 받은 제자를 대표로 하는 요한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만일 교회의 궁극적 권위가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있다면, 요한공동체는 누구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인가? 이 특별한 집단의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예리하며 질문의 핵심을 찌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1:22). ‘머물다’로 번역된 동사는 ‘거하다’는 동사로서 요한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연합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1:39; 4:40; 15:4~10).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예고와 그의 질문의 문맥에서 이 동사는 ‘살아남다’는 의미가 된다.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를 문법적으로 직역하면,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남아 있는 것을 내가 원한다 하더라도”가 된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저자 자신이 바로 다음 절에서 이 말씀의 오해의 소지를 지적한 것과 같이, 그 사랑 받은 제자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살아남아 있을 것을 예고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최초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은 그들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cf. 막 9:1; 계 3:11; 22:7, 12, 20). 그러나 이 말씀의 중심적 의미는 그 제자의 수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제자를 향한 주님의 뜻이 베드로의 것과 다를 수 있으며,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까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은 예수의 뜻과 다른 것에 대한 요구를 거절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cf. 2:4). 예수님은 사람의 뜻과 요구를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과 때를 따라 일하는 것과 같이, 베드로는 그 제자를 향한 주님의 뜻과 때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베드로와 그 사랑 받은 제자를 향한 예수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영광스러운 죽음을 죽는 반면, 그 제자는 예수님이 다시 올 때까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 것이다. 베드로가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는 일에서 모범이 되는 반면, 그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일에서 모범이 될 것이다. 그 제자와 그의 공동체를 향한 예수의 뜻이 다르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고 신실한 사랑으로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다시 강조한다. 이 말씀에서 강조형 이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말고 너는 오직 나를 따르는 일에 전념하라는 교훈이다. 저자는 예수님과 그 사랑 받은 제자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상기시킨다. 베드로는 그 다른 제자의 일에는 상관하지 말고 그 자신에게 위임된 일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베드로나 그 제자 중 한 사람을 낮추거나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는 동등한 차원에서 각자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한 사람에게는 이 일을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저 일을 맡기신다. 두 사람은 예수의 양들을 먹이고 지키는 일에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서로 다른 일꾼들이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각자가 동일하게 중요한 사역자들이다.


저자는 요한공동체 내부에 있었던 이 말씀에 관한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한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1:23). 형제들은 한 공동체에 속한 친숙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행전에 익숙하지만, 복음서들에서는 여기에만 나온다(cf. 20:17; 마 23:8). 그 사랑 받은 제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저자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 제자는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오해되었다. 이 문제는 요한공동체의 정황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관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예고하신 것으로 언급된다(막 1:15; 9:1; 13:30). 바울도 확실히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다(살전 4:13~18).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과 관련하여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래서 예수의 선포와 바울의 기대가 이 구절의 배경을 이룬다.


요한공동체 내의 일부 신자들에게는, 예수의 이 말씀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사랑 받은 제자가 죽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기대는 요한일서에서도 분명하게 언급되었다(2:28~3:3; cf. 계 22:20). 저자가 예수님의 재림을 그 사랑 받은 제자와 연결시키려는 이러한 오해를 바로 잡으려는 이유는 아마 요한복음 21장을 기록할 즈음에는 그 사랑 받은 제자가 이미 죽었거나 혹은 거의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지 않겠다”는 말씀이 두 번 모두 현재 시제로 된 것은 그 제자가 지금은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도 그 제자의 생전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주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공동체 내부에서 큰 불안을 일으켰다. 저자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의 정확한 인용을 통하여 그 사랑 받은 제자와 관련하여 그 형제들이 갖고 있던 오해와 부정확한 견해를 교정한다. 저자는 예수께서 그런 예고를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제자의 운명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베드로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과 베드로의 임무는 오직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뿐이라고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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